ㆍ메신저로 하루 23조원 오가… 장내시장 거래금액의 5배나
ㆍ인맥과 신뢰 중시 연줄로 엮여
‘12-6 50+.’
숫자와 기호의 조합으로 구성된 수수께끼 암호 같은 메시지가 메신저 채팅창에 뜬다. 채팅방에는 회원 수백명이 입장해있는 상태. 곧이어 한 회원이 ‘ㅎㅈ’이라는 문자를 띄웠다. 이어 수수께끼 암호를 띄운 회원이 ‘ㅎㅈ’ ‘ㄱㅅ’으로 응답했다. 불과 수초 만에 100억원짜리 거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장외채권 시장에선 메신저를 통해 하루에도 수십조원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12-6 50+’는 채권 브로커가 시장에 제시한 호가다. 채권을 사고파는 ‘선수(딜러)’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은어인 셈이다. 이 메시지의 뜻은 “2012년에 6번째로 발행된 금리 3.50%의 국채(국고채 3년물)를 100억원어치 사겠다”는 것이다. 맨 앞의 ‘12’는 2012년이라는 연도를, ‘6’은 채권의 발행순서를 각각 뜻한다. 채권 금리가 보통 3%대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앞의 숫자는 떼고 금리가 3.50%이면 ‘50’, 3.60%이면 ‘60’으로 표현한다. 쉽게 짐작하듯이 플러스 기호(+)는 사자, 마이너스 기호(-)는 팔자의 의미다. 액수는 기본 거래단위가 보통 100억원이기 때문에 종종 생략된다. 200억원어치를 거래하고 싶다면 ‘2개’라는 말을 덧붙이면 된다.
‘ㅎㅈ’은 확정의 약자로, “제시한 조건대로 팔겠다”는 의미다. ‘ㄱㅅ’은 감사의 약자로, “거래가 성사됐고, 고맙다”는 뜻이다.
(왼쪽 그림) 앞자리에 붙은 ‘11-5’나 ‘10-1’ 등의 숫자는 거래대상인 국고채의 발행연도와 발행순서를 뜻한다. 즉 2011년에 다섯번째로, 2010년에 첫번째로 발행된 채권이라는 뜻이다. ‘345’와 ‘34’는 해당 채권의 금리로 각각 3.345%, 3.34%를 의미한다. ‘거래’는 앞서 보여준 가격에서 시장의 시세가 형성됐음을 뜻하고 ‘거래 후 사자’는 같은 가격에 사자 주문이 또 있음을 알려준다. ‘통당’은 가장 최근에 발행된 2년 만기 통안채를 뜻하는 은어다. ‘15/1/26, 현대○○○○, 민3.68 팔자 100억’은 회사채 호가다. 2015년 1월26일에 만기가 돌아오는 현대○○○○의 회사채를 민간채권평가사 3개사의 평균 평가금리인 3.68%에 100억원어치 팔자는 뜻이다.
브로커가 제시한 거래 조건에 만족한 딜러 중 누구라도 먼저 매수나 매도 의사를 밝히면 거래는 바로 성립된다. 물론 짧은 메신저 대화만으로 수백억원대의 거래가 정식으로 체결되는 건 아니다. 거래 의사가 확인되면 전화상으로 다시 한번 거래 내용을 서로 확인한다. 통화내용을 녹취하고 계산서를 팩스로 주고받은 뒤 다음날 대금 결제까지 완료되면 비로소 거래가 완성된다.
이렇게 메신저를 통해 이뤄지는 장외 채권시장의 하루 거래규모는 금액으로는 23조원, 건수로는 3000건(2012년 평균)이 넘는다. 한국거래소에 개설된 장내 채권시장의 거래대금이 같은 기간 일평균 4조7000억원을 기록한 걸 감안하면 장외시장이 5배 가까이 큰 셈이다. 채권의 장내거래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국고채 전문 유통 딜러(증권사)를 선정해 시장조성에 나서는 등 정책적 유인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장외시장이 전체 채권시장의 70~80%를 차지하고 있다.
거래소 장내시장은 전자기반 시스템을 통해 경쟁 방식으로 시장 전체의 호가가 집중되며 가격이 형성된다. 주로 정부가 발행하는 국고채 지표물(3년, 5년, 10년, 20년)과 회사채, 국민주택채권 등의 소액채권이 거래된다. 반면 비지표 국고채와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통안채, 공사채, 은행채, 회사채 등이 거래되는 장외시장은 거래를 중개하는 브로커들이 일일이 매수자와 매도자를 찾아 연결해주는 방식이다. 양쪽의 조건에 맞는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정보 전달·공유의 수단으로 메신저가 사용된다.
장외 채권거래에 메신저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는 브로커들이 하루에도 몇번씩 직접 딜러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자’와 ‘팔자’ 주문을 전달했다. 2000년 채권시장에 시가평가제가 도입되면서 실제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을 빠르고 정확하게 반영해 거래하기 위해 야후와 사이보스 등의 사설 메신저를 사용하게 됐다.
메신저는 장외 채권시장 거래와 정보 교류의 핵심 창구지만 금리 담합이나 부당이익을 목적으로 한 통정매매 등에 활용되는 부작용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20여개 증권사를 대상으로 국민주택채권 매입 가격 담합 의혹을 조사하며 사설 메신저를 호가 공유의 수단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설 메신저는 국내 채권 유통시장을 독점하다시피하며 ‘채권시장의 HTS(Home Trading System)’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 금융투자협회가 사설 메신저의 대안으로 개발한 채권거래 시스템인 ‘프리본드’ 역시 시장의 외면을 받고 있다. 장외거래의 핵심인 익명성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채권시장은 흔히 진입장벽이 높은 폐쇄적 시장으로 평가된다. 시장에 참여하는 구성원의 숫자 자체가 적다 보니 개인적인 네트워크 형성과 신뢰 구축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현재 국내 채권시장에서 활동하는 브로커의 수는 대략 200~3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들을 통해 채권을 거래하는 각 증권, 보험, 은행, 연기금, 자산운용사 등의 소속 매니저(딜러) 수는 1000여명 수준이라는 게 중론이다.
브로커들은 자신이 담당하는 매니저들을 공식적인 직함 대신 ‘형님’ ‘누님’으로 호칭하며 친분을 쌓고 거래관계를 유지한다. 시장 특성상 매니저는 여러 명의 브로커가 내놓은 같은 가격의 물건 중 하나를 골라 매매를 하게 마련인데 기왕이면 안면이나 연줄이 있는 쪽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증권사에서는 채권영업을 담당할 신입사원을 고를 때 출신학교를 다양하게 안배하는가 하면, 초기 교육과정에서 동창회 주소록을 통해 업계에서 일하는 선배들을 찾아 인맥을 만들도록 교육하기도 한다. 사설 메신저의 채팅방 제목도 ‘양아치’(양띠 모임), ‘닭대가리’(닭띠 모임)처럼 또래끼리 모이거나 ‘엘리제’(고려대), ‘청송대’(연세대)처럼 학연으로 뭉치는 경우가 흔하다.
기본 거래단위가 큰 만큼 한 사람의 채권 딜러가 운용하는 자금의 규모도 천문학적이다. 경력과 조건에 따라 차이가 많긴 하지만 적게는 수백억원에서 대형 연기금의 경우 혼자서 수천억원에서 ‘조’ 단위의 거래를 주무르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큰돈을 움직이는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입은 어떨까. 중소형 증권사의 경우 대부분 딜러들을 연봉계약직으로 고용한다. 그중 운용 성과가 뛰어난 일부는 수억원대의 고액연봉을 받기도 한다. 때로 채권운용에서 훌륭한 실적을 낸 팀은 팀 전체가 함께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되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먹튀 논란도 있다. 장기물을 큰 금액으로 거래한 경우 1~2년 뒤 금리 변화에 따라 수익률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데 회사를 옮기면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형사들은 채권영업 인력들도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경우가 많다.
능력이 뛰어난 1급 브로커 역시 성과급으로 수억원을 챙길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브로커의 직업 수명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본다. 경험과 경륜 못지않게 빠르게 변하는 시장흐름에 대한 감이 중요한 데다 시간이 갈수록 영업 상대방인 채권운용 매니저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증권사 영업에서 채권의 비중과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올해 2분기 들어 유럽 재정위기 여파로 증시가 폭락하고 그에 따라 주식 거래대금도 현저히 줄어들면서 주식중개료 수익 비중이 큰 대부분의 증권사들은 수익이 급감했다. 실적 개선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채권운용의 중요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 또 최근 몇년 사이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에 돈이 몰리면서 개별 증권사들이 채권운용에 투입할 수 있는 자산도 그만큼 많아졌다. 대형사들의 경우 보통 6조~7조원에서 많게는 10조원가량의 자기자본을 채권에 투자하고 있다. 대형 증권사 사장 자리에 채권 전문가들이 잇따라 선임되는 것도 증권사 사업구조에서 점차 채권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으로 해석된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7202133595&code=9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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