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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출처 = 오주르디 블로그

 

2012년 12월 19대 총선에서 패배한 뒤 기회를 엿보던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는

김두관 전 지사가 대선출마를 위해 지사직을 내놓자마자 보궐선거에 뛰어든다. 경남도민은 4선 의원이며 여당 대표까지 지낸 동향 출신 거물급 정치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득표율 63%(119만표)를 기록하며 도지사실 접수에 성공한다.

 

주민이 위임한 권력으로 주민 복지 훼손시켜

 

입성하자마자 착수한 일이 있다. 진주의료원 폐업이다. 적자 누적에도 불구하고 노조가 기득권만 주장하는 상황이어서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게 이유였다. 2013년 5월 홍 지사는 주민들의 압도적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견수렴이나 합의과정도 없이 100년 넘도록 주민과 함께 해온 진주의료원 폐업을 공식 선언했다.

 

그가 폐업 명분으로 내건 ‘적자 누적과 노조 횡포’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었다. “진주의료원은 강성노조의 해방구”라고 목청을 높인 홍 지사의 주장과는 달리 계속되는 임금체불에도 직장을 지켜온 ‘착한 노조’였다. ‘적자누적’ 역시 폐업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만성 적자에 허덕이던 삼척의료원과 원주의료원 등이 흑자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첨단의료기기 확충, 서비스 향상 등 경영상태를 개선한 결과였다.

 

강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홍 지사는 웃었다. 지역이슈를 정치 쟁점화하는 데 성공하면서 그에 대한 강성보수와 극우진영의 격려와 찬사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진주의료원을 희생시킨 대가로 거머쥔 대차대조표에 흡족해 했다. ‘주민 반발’이라는 손실에 비해 ‘보수아이콘’으로 부각되며 형성된 이득이 더 크다고 봤던 모양이다. 그에겐 주민보다 정치가 먼저였던 것이다.

 

▲ 이미지출처 = 오주르디 블로그

 

무상급식 중단, ‘진주의료원 학습효과’에 매료된 독선

 

‘진주의료원 학습효과’에 흠뻑 매료된 그가 이번엔 더 큰 것을 들고 나왔다. 2009년부터 시행해오던 학교 무상급식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도의원 절대 다수가 새누리당 소속인 점을 활용해 관련 조례안 통과를 밀어붙였다. 홍 지사의 야욕과 거수기 역할을 한 도의원들이 22만 명 학생들의 밥그릇을 빼앗은 셈이다.

 

주민 의사는 철저하게 무시됐다. 도민 2/3가 무상급식 유지를 외쳐도 아랑곳하지 않지 않으며 빈정거리는 태도까지 보였다. 주민들과 시민단체가 강하게 비판하자 “학교에 밥 먹으로 가냐,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밥 먹는 곳 아니다”라고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홍 지사의 ‘무상급식 발언’을 모아보면 어지러울 정도다. 말 바꾸기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해 왔기 때문이다. “무상급식은 배급제로 밥을 제공하는 북한식 사회주의 논리”라고 주장하는 극우진영과 한목소리를 내다가도, 졸지에 말을 뒤집어 정반대 입장을 표명하곤 한다.

 

▲ <홍 지사 '거수기 역할' 한 뒤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경남도의원 (출처: 날으는 쏭군)>

 

무상급식 말 바꾸기... 경남도민은 노리개?

 

여당 최고의원과 당대표 등 잘 나가던 시절에는 “국가재정 파탄내는 진보좌파의 무상파티” “얼치기 좌파들이 내세우는 국민 현혹 공약”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다 유권자 눈치를 봐야할 상황이 되면 말을 바꿨다. 2012년 도시사 보궐선거 TV토론회에서는 “무상급식이 국민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말했고, 도지사 취임사에서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줄여서는 안 된다”며 무상급식과 노인틀니사업 같은 복지예산이 삭감되는 일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바꾸고 또 바꾸더니 다시 바꿨다. 2015년 경기도청 특강에서 “무상급식은 좌파들의 잘못된 논리에 국민이 놀아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민의 표가 필요할 때는 ‘무상급식 찬성’ 입장을 보이다가, 선거가 끝나고 권력을 손에 넣으면 ‘무상급식 절대불가’로 돌아선다. 경남도민이 노리개인가.

 

경남도민의 ‘홍준표 사랑’이 변함없을 줄 아나 보다. 보궐선거에서 압도적 지지로 승리하고 또 다시 60% 가까운 득표로 재선까지 되니 그렇게 착각하는 모양이다. 똑똑한 도지사가 아둔한 주민들을 좀 갖고 논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이 건가.

 

▲ <홍준표의 '무상급식 말 바꾸기' (출처: 안민석 의원)>

 

주민들이 맡긴 권력이 ‘흉기’로? 되찾아 와야

 

그렇다면 이런 도지사는 끌어내려야 한다. 주민들이 위임해준 권력을 자신의 정치적 영달을 위해 활용하고, 지역민의 의료복지와 학생들의 밥그릇을 희생제물 삼아 정치적 야욕을 채우기 바쁜 단체장은 주민들에게 해로울 뿐이다. 이런 사람의 손에 들어간 권력은 ‘흉기’나 다름없다.

 

주민들이 맡긴 권력이다. 이젠 주민들이 회수해야 한다. 지방자치법 제20조(주민소환)에 의거해 적법 절차를 거치면 홍 지사 수중에 들어간 경남도민의 권력을 되찾는 게 가능하다. ‘주민소환에 관한 법률’에 방법과 절차가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동 법률 제7조 1항에 따르면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의 경우 주민소환투표청구권자 총수 100분의 10 이상’의 청구로 주민소환투표가 실시될 수 있다. 주민소환투표청구권자라 함은 ‘19세 이상 투표권이 있는 주민’을 말한다. 단, ‘선출직 지방공직자의 임기 개시일부터 1년이 경과하지 아니한 때’에는 주민소환을 청구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있다. 홍 지사가 작년 7월 1일 취임했으니 올 7월부터는 주민소환 청구가 가능하다.

 

▲ 이미지출처 = 오주르디 블로그

 

밥그릇 빼앗긴 학생 부모들만 결집해도 ‘지사직 박탈’ 가능

 

경남도 유권자 수는 약 260만명. 이중 10%인 26만명 이상이 주민소환청구에 서명하면 소환투표가 실시된다. 지사직을 상실하게 만들려면 1/3인 87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해 이중 과반수가 찬성하면 된다. 최소 44만 명이 소환운동에 참여해 투표장에서 ‘찬성표’를 던지면 지사직 박탈이 현실화될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수치다. 이번 무상급식 중단으로 밥 그릇을 빼앗긴 학생수는 대략 22만 명. 이들의 부모들은 소환운동에 적극 참여할 가능성이 높다. 그 수는 어림잡아 40만 명에 달한다. 밥그릇을 빼앗긴 학생의 부모들만 참여해도 홍 지사에게 부여된 권력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주민소환투표로 직에서 쫓겨나는 사례가 나와야 주민을 희생시켜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채우려 하는 단체장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게 된다. 경남도가 그 시작이었으면 좋겠다. (☞국민리포터 ‘오주르디’ 블로그 바로가기)

 

출처: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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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아시아전문가 핼핀 주장…"경각심 가져야"

 

(워싱턴=연합뉴스) 김세진 특파원 = 현 일본 정부의 역사 수정주의가 군 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그 끝은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 즉 세계 제2차대전 직후의 미국 정부를 전쟁범죄자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미국의 동아시아문제 전문가가 경고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의 데니스 핼핀 연구원은 9일(현지시간) 외교안보 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일본 정부의 역사 수정주의 논리는 일본이 연합군에 의한 전쟁 피해자라는 전제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핼핀 연구원은 "역사 수정주의가 신나치주의자들의 전유물인 유럽에서와 달리 일본에서는 사회 지도층 인사와 정치인, 언론인들 중에서도 수정주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일본 인사들이 현재 부정하고 있는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의 범죄 행위는 역사를 판단하는데 필수적"이라며 "군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일본에 침묵한다면 결국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만든 논리를 모조리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그는 "난징대학살 때 최소 20만 명의 중국 군인과 민간인이 숨졌다는 점이 극동 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기록돼 있고, 따라서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를 추모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유대인 43만7천 명을 학살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추모하겠다는 것과 동격"이라고 날을 세웠다.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대학살 당시 중국 주둔 일본군 사령관이었고, 그의 위패는 현재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보관돼 있다.

 

독일 나치정권에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기획·실행한 아이히만은 1961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핼핀 연구원은 "미국은 1941년 진주만 기습을 당한 뒤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아닌 제국주의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었다"며 "동아시아 과거사 문제와 미국이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나아가 그는 "일본의 원폭 피해에 대한 가책을 표현해야 한다는 사람들도 그런 행동이 트루먼(전 대통령)을 전범으로 몰려는 일본의 우익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오도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smile@yna.co.kr

 

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3/10/0200000000AKR20150310002300071.HTML?input=1179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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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결정은 몇 가지 문제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까? 그쪽 문제나 먼저 해결 하세요."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논점 이탈의 오류(혹은 논점 흐리기 오류)이다. 논점과 책임을 엉뚱한 데로 돌려 본질을 흐리는 방법이다. 비단 정치권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도 많이 사용하는 위기 탈출법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미지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비슷한 논리적 오류로 '레드 헤링(붉은 청어)'이 있다. 훈제한 청어는 특유의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데, 과거 영국에서는 '레드 헤링'을 사용해서 여우 사냥개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압도적인 냄새를 내는 '레드 헤링'을 뚫고 먹잇감을 찾아내도록 후각을 단련시킨 것이다.


논쟁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핵심을 놓치고 방황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우리의 눈앞에는 분명 '레드 헤링'이 나타났을 것이다. '아, 말렸다'고 탄식해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논쟁은 표류했고, 남은 것은 지엽적인 문제들이나 자극적인 가십뿐이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공격하라!"


지난 22일, 단식을 40일 째 이어오고 있던 고(故) 김유민 양의 아버지 김영오(47)씨는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인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시민사회를 비롯한 각계각층은 '유민 아빠를 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아 외쳤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를 원하는 시민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유가족이 동의하는 세월호 특별법을 정면으로 가로막고 있는 청와대와 새누리당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들에게 가장 껄끄러운 대상은 바로 '유민 아빠' 김영오 씨였을 것이다.


'타깃'은 확실해졌고, 방법은 늘상 해왔던 '본질 흐리기'였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힘으로써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케 하고, 이를 통해 가족을 분열시키는 한편 시민들을 혼란 속으로 빠뜨리는 것 말이다. 결국 김영오 씨 앞에 붙은 수식어 '유민 아빠'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을 것이다.



지난 23일 유민이의 외삼촌이라고 주장하는 윤 모씨가 세월호 관련 기사에 위와 같은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 이 글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를 통해 급속히 퍼져나갔다. 또, 김영오 씨가 이혼을 했다는 사실과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조직원이라는 사실도 무분별하게 옮겨졌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내용들이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고, 이런 과정을 통해 점차 본질은 사라지고 가십거리만 남게 됐다.


가족대책위는 기자회견을 통해 "유민 아빠의 고향인 정읍에 국가정보원 요원이 내려가서 어떻게 생활하고 자랐는지 쑤시고 다니는 사실을 포착했다"면서 국정원이 김영오 씨를 사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러한 의혹 제기에 대해 국정원은 "김영오 씨의 두 딸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조사한 사실이 없고 지시조차 한 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국민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국정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병원에 이틀간 있어보니 각종 악성 루머와 댓글이 난무하더군요. 그래도 난 떳떳하니까 신경 안 쓸 겁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에 대한 악성 루머가 독버섯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김영오 씨는 결국 자신을 둘러싼 음해성 의혹 제기에 대해 해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외삼촌이 쓴 댓글에 대해서는 "유민 엄마나 동생이나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민 엄마가 동생에게 전화해서 화를 냈고 바로 글을 내렸다"면서 이 정도면 어떤 상황인지 알 것이라고 설명했다.


외삼촌이 어떤 의도로 그 글을 썼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설령 외삼촌이라고 하더라도 부부의 관계나 부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제3자에 불과하다. 또, 유민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동생에게 연락을 취해 화를 낸 후 글을 내렸던 점을 미뤄볼 때, 감정에 휩쓸려서 글을 작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글의 내용도 정제되어 있다기보다는 감정 과잉으로 보인다.



세월호 참사로 숨진 김유민 양의 동생인 김유나(17) 양은 <오마이뉴스>에 아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면서 외삼촌의 댓글에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서 옮겨두었다. 이 정도만 읽어봐도 외삼촌의 댓글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확실히 드러난다. 오히려 외삼촌이 그런 댓글을 단 의도가 단순히 김영오 씨에 대한 악감정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클릭해서 확인해보길 바란다.


- 외삼촌이 쓴 댓글을 언제 봤나요?

"오늘 아침에 봤어요. 좋은 아빠인데, 그런 얘기로 알려져서 좋은 아빠라는 점이 가려졌어요. 좋은 아빠인 것이 다시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기소권과 수사권이 포함된 세월호 특별법 만들려는 아빠의 노력이 무너진 것 같아서 속상해요."


- 글을 본 뒤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당황스러웠어요. 제게 아빠는 착하고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예요. 삼촌 글에서는 아빠와 딸 사이가 좋지 않게 보였어요. 삼촌은 아빠가 나쁜 사람이라고 글을 썼는데…. 저로서는 당황스러웠어요."


(…)


-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안녕, 아빠. 어렸을 때부터 자주 못 봤지만, 언니와 나를 잘 챙겨줘서 고마워. 아빠가 잘 챙겨주려고 노력한 것들 다 보였어요. 너무 고마워요. 또 아빠가 전화할 때 사랑한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아빠가 먼저 사랑한다고 안 하면 나는 사랑한다고 말 할 일이 없었어요. 아무튼 다 고맙고 몸부터 챙겨요. 그래야 싸우죠, 사랑해요."


"좋은 아빠인데, 외삼촌 글 '당황' 아빠의 노력 무너진 것 같아 속상" <오마이뉴스>



다음은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둘러싼 음해성 의혹 제기와 그에 대한 김영오 씨의 대답을 간단히 정리한 것이다.


1. 10여 년 전에 이혼한 후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매달 비정규직 월급으로 대출 이자도 갚기 힘들게 살다보니 양육비를 꼬박꼬박 보내주지 못하고 몇 달에 한 번씩 보낼 때도 있었다. 우리 부녀지간은 일년에 몇 번 안 보더라도 사랑이 각별했다. 이혼하고 너무 힘들게 살다 보니 두 아이를 보고 싶어도 자주 못 보고, 사주고 싶어도 많이 사주지 못했던 것이 한이 맺히고 억장이 무너지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것이다."


2. 보험금을 챙긴 것 아닌가? 실제로는 돈 때문에 단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달 전 학교에서 여행자 보험금 1억원이 나왔는데, 이혼한 부모에게는 보험금이 50 대 50으로 나온다. 나는 우리 유민이한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만 하면 죄인이 된다. 그래서 보험금을 10원도 안 받고 유민 엄마에게 전액 양보했다. 우리 유민이 앞에 놓고 보상금 얘기 두 번 다시 하지 않았으면 한다. 저는 지금 돈 10원도 필요 없고, 유민이가 왜 죽었는지 밝혀내는 게 우선이다."


3. 김영오 씨는 금속노조 소속 조직원이다.


"작년 7월 22일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다 정규직으로 전환됐고,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노조 조합원이 돼 봤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자동으로 조합원에 가입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조 조합원을 떠나서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입장으로서, 아빠로서 싸우고 있다."



김영오 씨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정체불명의 악성 루머들은 여전히 떠돌아다닐 것이다. 그러한 루머를 퍼뜨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본질 흐리기'일 테니 말이다. 어떻게든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해코지해서 그의 '아빠'로서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고자 할 것이다. 이미 그 작업은 조직적으로 본격화됐다. 그리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라고 하는 본질과 이에 대한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들의 요구가 김영오 씨의 사생활 논란으로 비화(飛火)될 가능성이 높다. '이혼', '노조' 등의 단어들이 포함된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질 것이고, 사람들은 이러한 가십에 눈과 귀과 쏠려 '본질과 핵심'은 까마득히 잊어버릴 것이다. 급기야 김영오 씨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레드 헤링'을 통해 사람들을 홀리기 위한 꼼수에 흔들리지 말자. 왜곡된 정보에는 단호하게 대응하자. 위에 정리해둔 김영오 씨의 대답을 근거로 악성 루머를 응징하도록 하자. 그리고 거기에 그치지 말고, '제대로 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라고 하는 '본질'을 잊지말고 거듭해서 이야기하자.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

 

출처: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305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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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기지촌에는 인신매매되어 오게 된 미성년 여성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는 이런 상황에 눈을 감았다. ‘미군에게 접대 잘해달라’는 교육만 진행했다. 교육에 나선 공무원들은 기지촌 여성들을 ‘달러를 벌어들이는 산업역군’이라 치켜세웠다. 1970년대 동두천의 기지촌 풍경.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커버스토리
기지촌 여성 김정자의 증언

▶ ‘우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미군 기지촌 여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할 때 가장 큰 고민이 이거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정부가 미군을 위한 위안시설과 여성들을 관리했다고 폭로하고 나섰습니다. 국가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잘 몰랐던 미군 기지촌의 불편한 비밀들. 김정자씨의 증언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김정자(가명)입니다. 올해 예순넷입니다. 큰 지병은 없지만 요즘 무릎관절이 좀 아픕니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오늘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이렇게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저는 미군 위안부였습니다. 기지촌으로 인신매매되어 평생을 미군한테 당하면서 억울하게 살아왔지만 아무도 저와 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일한 거 아니냐는 색안경만 끼었어요.

 

우리가 미군한테서 벌어들인 달러로 나라를 이렇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때는 우리더러 ‘애국자’라 그러더니 국가는 우리의 존재를 모른 척하고 있어요. 우리는 늙고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저의 언니들(기지촌 동료)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더는 못 보겠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우리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왜 국가에 이런 싸움을 시작하는지 저의 인생을 통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송에 참여한 여성 122명이 다 김정자씨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피해의 구조가 비슷한 여성들이 상당하다. 김정자씨의 증언을 대표적으로 살펴보되, 기지촌에서의 경험은 여성마다 다르다는 점을 밝힌다.

 

미군 기지촌에서 미군과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은 미군 위안부, 기지촌 여성, 특수업태부, 양공주 등으로 불려왔다. 정부는 위안부와 특수업태부를 혼용해 사용해왔다. 1957년 제정된 ‘전염병 예방법 시행령’ 제4조에서 규정한 ‘위안부’는 1969년의 개정 법률에서 그대로 사용되다가 1977년 개정 시 삭제된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까지도 시·군 공무원들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을 한국 남성과 성매매를 하는 윤락여성과 구분해 위안부라고 불렀다.(<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 39쪽)

 

1950년대 전쟁통에 아버지 잃고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하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 꾐에
열여섯에 집을 나와 찾아간
그곳에서 지옥은 시작되었다

“그 시절에도 성매매는 불법
미군 기지촌만 합법이었어요
공무원들은 한달에 한번씩
‘미군한테 서비스 잘하라’며
애국자라 치켜세워줬어요”

 

스무살로 위장시키는 포주…하루 서너명씩 받아

 

“저는 1950년 1월에 태어났습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어렸을 때 천안에서 살았어요. 친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전쟁통에 저를 보러 왔다가 탈영병이 되어서 헌병한테 잡혀갔어요. 그냥 맞아서 죽었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재혼했어요.

 

제가 열두살 때쯤부터인가 제 의붓아버지는 어머니만 없으면 저를 겁탈했어요. 의붓오빠들도 저를 건드렸어요. 그걸 어머니께 말도 못 하고 꾹 참다가 열여섯살 때(1965년께) 집을 나와버렸어요. 제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어요.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거예요. 방직공장이라고 했어요. 걔를 따라 서울역까지 기차 타고 왔어요.

 

서울역에서 친구 따라 또 어딘가로 갔는데 뭔가 이상한 거예요. 방직공장은 안 보이고 미군들만 길에서 ‘쌀라쌀라’ 거리면서 돌아다니더라고요. 어떤 집으로 들어갔는데 집에 ‘남바’가 붙어 있었어요. 1호실, 2호실, 3호실 이렇게. 저는 여관인 줄 알고 잤어요. 제 친구는 다음날 잠깐 어디 좀 다녀오겠다고 하더니 안 왔어요.

(50대로 보이는) 어떤 아줌마가 나타났어요. 나보고 따라오래요. 공장에 데려다 주려나 보다 싶어 따라갔어요. 그런데 저더러 하는 얘기가 ‘네 친구가 빚을 안 갚고 도망갔으니 네가 갚아라’고 하는 거예요. 얼마인지는 얘기도 안 해주고, 친구 대신 돈을 갚아야 제가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어떻게 돈을 버냐고 물었어요. 밤에 언니들 따라가 보면 안다고 했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제가 간 곳은 파주 용주골(연풍리)이라는 데였어요. 미군기지 주변에서 여자들이 몸 파는 곳이었어요. 제 친구가 빚을 갚지 못해 저를 팔아넘긴 거였어요.”

 

김정자씨는 인신매매를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기에는 김정자씨의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렸다. 친구의 행동이 원망스러웠지만 김씨는 하는 수 없이 친구의 빚을 갚기로 결심했다.

 

“아줌마(포주)는 저더러 클럽 나가서 손님(미군) 데려오라고 했어요. 저는 3일인가 있다가 그 포주집에서 도망갔어요. 근데 골목에서 잡혀버렸어요. ‘뒤지게’ 맞았어요. 한번만 더 도망가면 섬으로 끌고 가서 죽여버린다고 했어요.

 

(포주가) 파스 갖다 붙여주고 세코날(진정제)을 줬어요. 기분 좋게 해주는 거라면서 줬어요. 하나 먹으면 (중독되어서) 두개 먹어야 하고, 세개 먹으면 네개 먹게 돼요. 손님 데리고 오라고 내보내면 제가 무서워서 말을 못 붙였어요. 맨정신으로는 창피해서 손님 못 끌어요. 저는 그 약이 뭔지도 모르고 계속 먹었어요.”

김씨는 나중에 이것이 마약인 것을 알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약을 먹어야만 히파리(호객행위)를 하러 나갈 수 있었다. 김씨가 미군을 데리고 올 때까지 집(숙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한두달 일하면 빚을 갚을 줄 알고 김씨는 그냥 눈을 질끈 감고 기지촌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거기서 헤어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빚은 계속 늘었어요. 방값이랑 화장품·미장원비랑 세코날비랑 내야 하는데 아무리 일해도 못 갚는 거예요. 이자는 계속 붙었어요.”

 

보통 기지촌에는 위안부 여성들의 자치조직이 있다. 자매회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기지촌에서 일을 하려면 이곳의 회원으로 등록해야 한다. 자매회에서는 뻔히 미성년자인 것을 알면서 회원증을 주고 검진증(성병에 걸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증)을 발급해 주었다는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이 많다. 보통 포주들은 십대 아이들에게 스무살이라고 말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김정자씨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다. 보통 기지촌 여성들은 하룻밤에 미군을 서너명씩 받아야 하는 경우가 예사였다.

 

“그러면 거기(음부)가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긴밤·짧은밤(성매매 시간 단위) 아무리 해도 끝이 없었어요. 긴밤은 제 방에서 밤새 자고 아침에 일찍 가는 거고 10달러 받아요. 짧은밤은 제 방에서 30분에서 1시간 있다 가는 거예요. 돈은 모두 아줌마가 가져가 버려요. 제가 직접 못 받아요. 아줌마는 한달 계산해 준다면서 다 뺏었어요. 1~2개월이면 빚 다 갚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돼요.”

 

기지촌의 10대 아이들은 셈법에 밝지 못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다. 포주는 공포의 대상이라, 장부에 무엇이 어떻게 기록되는지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여성들은, 아니 10대의 아이들은, 밤새 울고 밤새 미군의 노리개가 되어 고통의 몸부림을 쳤다.

 

“도망을 갈 수가 없었어요. 일하러 갈 때 늘 남자(포주집에서 일하는 건달)들을 붙여 감시해요. 목욕을 가면 자기네(포주집)에서 제일 오래 있는 년, 주인한테 아부하는 년이랑 같이 목욕을 보내요.

 

경찰한테 신고할 수도 없어요. 주인집에 경찰이 낮에 놀러 와요. 주인아줌마한테 누나라 그러면서 들어와요. 그러면 아줌마는 담배도 싸서 주고 그래요. 처음에 저는 아줌마 남동생인 줄 알았는데 옆의 언니들이 형사라고 귓속말해주는 거예요. 주인이 다 돈 먹이는 거라고. ‘경찰에 신고해도 내가 못 나가는구나’ 그걸 알게 되는 거죠. 내가 죽어서야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한국전쟁은 이 땅의 여성들에게도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 122명은 국가를 상대로 피해배상 소송을 하기로 했다.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건물 4층에서 열린 소송 기자회견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왜 그토록 미군과 결혼하려고 했는가

 

“한번은 그래도 용기를 내어서 도망갔어요. 용주골에 인신매매되고 몇개월 뒤였어요. 파출소로 들어갔어요. 40대쯤 되어 보이는 경찰이 ‘왜 남의 빚 져놓고 도망가냐. 안 갚으면 영창 간다’고 하는 거예요. 포주들이 경찰서에 다 돈을 집어주던 시대였어요. 하는 수 없이 다시 포주집으로 돌아갔지요. 골방에 갇혀 또 뒤지게 맞았어요.”

 

김정자씨는 죽어서 절대 산에 묻히고 싶지 않다. 그가 산에서 겪은 고통스런 경험 때문이다.

 

“산에 가서 미군을 받아야 할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부대에서 훈련을 나가면 저희도 따라가야 했어요. 밤에 컴컴해지면 담요 하나 들고 아줌마 따라서 가요. 아줌마가 보초 서는 미군이랑 솰라솰라 말해요. 그럼 훈련 장소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총 들고 서 있던 놈들이 막사에 가서 여자들하고 잘 사람 나오라고 말해요. 이식스, 세븐(E-6는 하사, E-7은 중사)들도 다 했어요. 장교들은 특별히 막사 안에서 해요. 일반 병사들은 훈련장 안에 나무 있는 데에 담요 깔아놓고 하거나 구덩이를 파놓고 해요. 미군들이 파놓은 구덩이지요.”

 

기지촌 여성들은 그렇게 훈련장에까지 불려 가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담요로 삼고’ 미군을 받았다. 제대로 씻을 시간도 없었다. 돈을 벌어서 내려가야만 포주가 혼을 내지 않는다. 어떤 미군은 돈 대신 자신들이 먹는 말라붙은 밥을 던져주어 여성들을 애타게 했다. 여성들은 한번 훈련장에 가면 그곳에서 새벽까지 보내다 돌아왔다고 한다.

 

안전한 성관계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보장되기 어려웠다. “어떤 미군은 콘돔을 안 끼고 해요. 우리는 거절을 못 해요. 그래서 낙태도 참 많이 했어요. 뗀 애만 열일곱이에요.”

 

보건소는 포주들이 끌고 갔다. 강제로 낙태시키는 것이다. 창자까지 다 빠져나오는 고통을 견디며 여성들은 낙태 수술을 견뎠다. 낙태 이후에는 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파도 또 일하러 가야 했다. 포주들은 낙태 수술로 상한 몸을 보살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약과 찬물 한컵 정도 들이켜고 다시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루 그냥 쉬면 빚이 얼마나 늘어날지 알 수 없었다.

 

“이러고 살아야 하니 죽고 싶은 생각만 들지요. 기지촌에서는 한달이면 두세번은 장례를 치러야 했어요. 철길로도 뛰어들고 연탄불 피워놓고 그 가스도 먹고. 저도 세번 죽으려고 시도했어요. 그런데 무슨 놈의 팔자인지 다 깨어났어요.”

김정자씨는 죽으려 해도 죽지 못했다. 공동묘지에서 자살을 기도하면 묘지 관리인이 발견하고, 집에서 동맥을 끊으면 자신을 보러 온 미군이 발견하곤 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왜 죽으려 하느냐’고 묻곤 했다. 김씨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왜 우리들이 미군하고 그렇게 기를 쓰고 결혼하려 했는지 알아요? 그게 아니면 여기를 탈출할 방법이 없었어요. 빚을 갚을 방법이 없어요. 도망가려 해도 경찰 누구도 안 도와주고. 우리에겐 국가가 없었어요.”

 

아니, 국가는 있었다. 미군한테 성접대 잘하라고 교육하는 국가는 있었다. 자매회 회의가 한달에 한번씩 열리면 여성들은 참석해서 교육받아야 했다. 안 그러면 영업을 못 했다. 회의에 가면 헌병, 시아이디(C.I.D. 미군부대 범죄수사과), 보건소 직원, 경찰서장, 군청 공무원들이 모두 와 있있다. 미군은 슬라이드(필름)를 이용해 성병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까지는 그들의 할 일이라고 이해할 법하다.

 

파주 용주골에 팔려간 뒤
동두천·군산·평택 전전
40대 중반에 기지촌 빠져나와
도망가고 싶어도 붙잡힐까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군부대에서 훈련 나가면
저희도 산에 따라가야 했어요
그때가 가장 무서웠어요
산에서 안한다고 반항하다가
죽은 아가씨들도 있어요”

 

‘토벌’당한 성병 의심자들, 언덕 위 하얀 집으로

 

하지만 공무원들은 이상한 교육을 더 했다.

“나와서 늘 하는 말이 이거예요. ‘아가씨들이 서비스 좀 많이 해주십시오. 미군한테 절대 욕하지 마십시오. 바이 미 드링크(Buy me drink. 술 사주세요) 하세요. 그래야 동두천에 미군들이 많이 옵니다. 우리나라도 부자로 한번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군수는 저희더러 달러 벌어들이는 애국자라고 치켜세웠어요. 그러면 저희는 그래야 되나 보다 하는 거예요.”

 

일종의 정신교육 같은 것이었다. 여성들은 왜 이런 교육을 받아야 되는가 싶었지만 국가가 노후를 책임져준다고 하니까 그런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턱걸이(동두천시 광암동 일대)에다가 공장을 짓고 아래층에는 가발공장, 위에는 기숙사로 만든다고 공무원들이 설명했어요. 나이 먹으면 여기에 우리가 살 수 있다고 군수가 그랬어요. 땅을 다 사뒀다고. 그러니 열심히 달러 벌라고. 우리는 늙어도 갈 데가 있구나 하고 그렇게 믿었어요. 하지만 그 약속이 지켜진 건 하나도 없지요. 포주들은 저희가 벌어온 돈으로 집도 사고 땅도 샀는데. 어떤 악명 높은 포주는 나중에 경기도의원이 되더군요.”

 

경찰은 인신매매되어 팔려온 아이들을 구출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성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가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 잡아가는 것도 비인간적이었다.

 

“성병 걸린 미군이 찾아와 칸택(contact·미군 성병환자에게 성병을 감염시켰을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을 찍는 것)을 하면 그냥 끌려가요. 찍히면 가는 거예요. 그 미군이 어디서 성병 옮아갖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걸 토벌당한다고 불렀어요.”

 

‘토벌당해’ 파출소에 끌려가면 유치장에서 머문 뒤 곧바로 낙검자 수용소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성병이 있거나 없거나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병이 있다 하더라도 그냥 환자일 뿐인데 죄인처럼 다루어졌다.

 

“하얀 집(동두천시 소요산 아래 낙검자 수용소를 기지촌 여성들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 불렀다.) 가면 운동장이 크게 있는데 토벌당한 여자들 실려 오면 (건물 문을) 철커덕 잠그고 꼭 교도소 같았어요. 나갈 수 없어요. 화장실만 갈 수 있게 했어요. 유치장 같은 데서 다섯명씩 자야 해요. 바깥 창문은 쇠창살이 설치돼 있고 면회 와도 쇠창살 사이로 얼굴 보면서 얘기해야 했어요. 아니, 우리가 죄인이에요? 환자를 왜 죄인 취급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성병에 걸린 미군에게 무슨 조처를 했는지는 여성들에게 통보되지 않는다. 오로지 국가는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의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데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비쳤다.

 

“우리는 페니실린을 맞았어요. 그거 맞고 쇼크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어요. 맞으면 걸음을 못 걸어요. 엉덩이 근육이 뭉치고 다리가 끊어져 나가는 거 같아요. 그걸 이틀에 한번 맞아요. 괴로운 언니들은 옥상에 올라가 떨어져 죽거나 반병신 되고 그랬어요. 저는 하얀 집에 (1982년께) 2주 동안 붙잡혀 있다 나왔어요.”

 

김정자씨는 (1965년께) 파주 용주골에 팔려 간 뒤 동두천, 용산, 군산, 평택과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40대 중반(1990년대 중반)에야 기지촌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스물다섯 때(1974년께) 기지촌에서 한번 도망 나왔지만 다시 동두천 기지촌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어디를 도망가더라도 깡패를 보내 저를 잡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어디 공장에 취직하려면 제 신분증을 제출해야 하는데 제가 동사무소 가서 주민등록증 발급받으면 포주집에 진 빚 때문에 경찰이 저를 잡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김씨는 ‘스스로 기지촌에서 살아온 여성들을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니네들이 좋아서 (기지촌 생활) 했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그런 질문을 참 많이 들어요. 한국 정부가 미국 안 끌어들였으면 우리가 이렇게 되었겠어요? 알고 봤더니 그 시절에도 성매매 행위는 법으로 금지돼 있었더라고요. 미군 기지촌만 성매매가 합법이었어요. 박정희 정부가 왜 그런 법을 만든 걸까요. 저는 잘 모르지만 미군 붙잡아 두려고 그렇게 한 거 아니겠어요? 우리더러 달러 벌게 하려고.”

미군 기지촌의 형성 과정에 국가의 어떤 정책이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옳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스무살도 안 된 소녀들이 기지촌에 팔려 오고,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국가가 계속 방치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국가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김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고 믿는다.

 

‘식모 자리’ 알아봐준다고 따라가면 기지촌

 

 

“억울해 죽겠어요. 저같이 거기 인신매매되어 간 사람이 너무 많아요. 직업소개소에서 식모 자리 알아봐준다고 해 따라가고, 밥 준다고 따라가고 해서 가 보니 기지촌인 경우들이 너무 많았어요. 미군 위안부로 살 줄 알았다면 누가 거기 따라갔겠어요.

 

일본군 위안부도 인신매매되어 간 사람이 많다고 들었어요. 일본군 위안부는 피해자로 인정하는데 왜 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국가가 눈감고 있는 건가요. 당한 사람은 있는데 왜 책임지는 사람이 없냐고요. 당신 딸들이 붙잡혀 간 거라면 가만히 있겠어요? 언니들이 늙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어요.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다가 벌써 세분이나 돌아가셨어요. 저는 사과를 원해요. 늙고 병든 우리 몸뚱어리를 국가에서 책임져주기를 바라요. 그게 국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어요.

 

하늘에 있는 우리 (기지촌) 언니들을 위해서 제가 이렇게 나섰어요. 누군가는 증언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용기를 냈어요. 사람들이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어요. 제발 잘 좀 보도해 주세요.”

 

김정자씨는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기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지난달 20일 약 4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할 때 그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30분 증언하다 10분 울고, 30분 증언하다 다시 10분 우는 것이 반복됐다. 낙검자 수용소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고백할 때는 구토를 하기도 했다.

 

인생 전체가 국가가 간섭한 성폭력으로 얼룩져 있던 그에게 이번 인터뷰는 그렇게 힘든 과정이었다. 따라서 인터뷰 때 자세한 내용을 묻지 않고 최소한의 질문만 하려고 노력했다. 대신 김씨와 진행한 인터뷰와 그의 증언록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2013)의 내용을 종합해 이 글을 썼다.

 

김정자씨는 인터뷰 뒤 바닷가로 가 새움터(기지촌 여성 지원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다음날까지 통곡했다고 한다. 힘든 인터뷰를 결심해준 김씨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김정자씨는 현재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번다. 그를 부양하는 가족은 없다. 대신 새움터의 도움을 받고 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45563.html?_ns=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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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네티즌이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 글을 올리고 있다. (한겨레DB)

세월호 희생자·유족에 악성 댓글 활개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포털사이트 게시글에 희생자를 모욕하는 욕설 댓글이 달려 물의를 빚고 있다.

 

문제가 된 댓글은 네이트판에 올라온 ‘어느 여고생의 꿈’이라는 제목의 글에 달렸다. 글은 ‘뉴스타파’ 김진혁 PD의 미니 다큐 <5minute>의 내용을 통해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세월호 희생자 박예슬양의 추모 전시회를 소개했다. 박양이 그린 그림과 디자인 등을 담은 추모 전시회는 7월4일부터 서울 종로구 서촌갤러리에서 무기한으로 열린다.

 

네이트판 아이디 핑쿠핑쿠를 쓰는 누리꾼은 29일 오후 3시께 이 글에 ‘일진이구만’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달았다. 욕설로 점철된 세 줄 가량의 글로 희생자를 모욕했다. ‘뭐? 반정부시위라도 해주리?(ㅋㅋㅋ)’라는 내용으로 댓글을 올린 누리꾼도 있다.

 

박씨 추모 전시를 기획한 장영승 서촌갤러리 대표는 “부모님들이 너무 가슴 아파 하고 계시다. 즉각 삭제를 요청했지만 요청한 사람이 당사자가 아닌 경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는 대답을 (네이트판 누리집을 담당하고 있는) 에스케이플래닛 쪽에서 들었다. 예슬이는 없는데 그럼 누가 신청해야 한단 말인가. 표현의 자유 같은 민감한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은 이해하지만 세월호 참사 희생자에 대해서만큼은 좀 더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댓글은 30일 낮 12시께까지 그대로 공개돼 있다가 삭제됐다. 에스케이커뮤니케이션즈 관계자는 “댓글의 경우 신고가 들어오면 24시간 내로 확인 절차를 거쳐 삭제하게 된다. 주말인 탓에 조금 늦어졌을 수는 있지만 신고에 따라 처리하고 있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롱 섞인 글들은 일간베스트 사이트에도 다수 올라와 있다. ‘아직 세월호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는 사진을 올려놓고 ‘xx 언제 끝나는 거야, 아시안게임 할 때도 저 xx할 듯(나의*****)’라고 적거나 세월호 참사 유족 예우 항목을 열거한 뒤 ‘놀러가다 사고사로 죽은 세월호 유족의 예우 봐라 기가 찬다(후****)’ 따위다.

 

장 대표는 “우리 사회 아주 일부에서지만 세월호에 대한 조롱 섞인 글이 서서히 번지고 있는 상황이 불안하다. 유족들의 아픔을 생각해서라도 좀더 엄격하게 관리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44734.html?_ns=c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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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2월이 되면 훨씬 더 많은 인물들의, 훨씬 더 많은 문제가 불거져 나올 것이다. 이런 경우, 외형상 재산이 많은 공직자에게 검증이 집중되기 마련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인물이 의외로 문제투성이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청백리 이미지를 유지하며 별 탈 없이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의외로 '알짜배기' 탐관오리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주인공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청백리로 알려져 있는 황희 정승이다. 그는 실상은 '알짜배기' 탐관오리였다.

이리 지저분한 사람이 어떻게...



황희의 초상화.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일반인 차림으로 황희 정승의 집을 방문한 세종대왕이 그의 청빈한 삶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일국의 정승이 집에서 멍석을 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밥상에 누런 보리밥과 된장에 고추밖에 없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말고,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황희의 모습은 정반대다. 이렇게 지저분한 사람이 어떻게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세종 10년 6월 25일자(1428년 8월 6일) < 세종실록 > 에는 모친상 중의 예법 위반으로 비판을 받은 황희가 세종의 만류를 무릅쓰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소개한 뒤(A), 황희의 부정부패를 노골적으로 고발하는 내용이 나온다(B).

여기서 A부분은 세종 당시의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고, B부분은 세종과 황희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 세종실록 > 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추가된 내용이다.

< 세종실록 > 을 편찬할 때 사관들 사이에서는 황희의 행적에 관한 논란이 많았다. 일부 사관들은 황희의 비행을 폭로하고, 나머지 사관들은 "처음 들어본 이야기"라며 "설마 그랬겠냐?"며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황희의 부정부패를 기록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해서 추가된 것이 B부분이다.

B부분에 따르면, 황희의 별명은 '청백리 재상'이 아니라 '황금 대사헌'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황금 검찰총장'이었다. 그렇게 불린 것은 황금처럼 빛나게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 세종실록 >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익정에 이어 대사헌이 되었다. 둘 다 승려인 설우로부터 금을 받았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황금 대사헌'이라 불렀다."

대사헌이 된 뒤 승려로부터 황금을 뇌물로 받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물론 이 별명은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만 회자됐다. 대부분 사람들은 황희를 청렴한 인물로 인식했다.

황희의 비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무를 담당한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고 < 세종실록 > 은 말한다. '형옥을 팔았다'는 것은 형사사건 당사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재판에 개입했다는 뜻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도 재산을 취득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 "재산 형성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나 자신이 벌어들인 월급에 비해 너무 많은 재산을 보유한 경우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된다.

황희도 그런 의혹을 받았다. 노비가 재산으로 취급되던 그 시절에, 황희는 "어떻게 저렇게 많은 노비를 거느릴 수 있을까?"라는 의혹을 받았다. 위 날짜의 < 세종실록 > 에 따르면, 그가 아버지 및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는 얼마 되지 않는 데 비해, 관료가 된 이후에 보유한 노비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428년 당시, 황희는 44년째 근무한 베테랑 관료였다. 이런 장기 근무자가 많은 노비를 보유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희의 경우에는 44년간 받은 봉급을 감안한다 해도 너무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의혹을 받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천 명이나 2천 명 정도의 노비를 보유하면 '노비를 꽤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황희가 보유한 노비 숫자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만약 몇 십 명 정도를 보유했다면 "근무 연수에 비해 노비가 너무 많다"란 말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천 명에 가까운 노비를 보유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특경비(특정업무경비)를 갖고 재테크를 잘한 덕분에 그렇게 많은 노비를 모았는지도 모른다.

잘 알려지지 않은 황희의 비리



 

조선시대 노비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황희의 비위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 편의 기사로는 충분치 않다. 그의 비리 중에서 '센 것' 하나만 더 소개하고자 한다.

위 날짜의 < 세종실록 > 에는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맞섰던 박포란 사람의 아내가 등장한다. 박포의 아내는 노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수노(우두머리 노비)가 이 사실을 포착하자, 박포의 아내는 수노를 죽인 뒤 시신을 연못에 버렸다. 여러 날 뒤 시신이 발견됐고 범인도 밝혀졌다.

박포의 아내는 어디론가 숨어야 했다. 사법당국이 추적하는 상황에서 그는 황희의 집 정원에 있는 토굴에 숨기로 결심했다. 범인이 설마 황희의 집에 숨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이곳에서 수년간 숨어 살다가 당국의 수사가 종결된 다음에야 다른 곳으로 떠났다.

박포의 아내를 두고 "배포가 대단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 배포가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여성을 숨겨준 황희가 훨씬 더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 황희가 그저 동정의 눈빛으로 숨겨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탐욕의 눈빛으로 그 여성을 숨겨주었다. 숨겨주는 조건으로 토굴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동화책이나 신문 칼럼 같은 데서 황희의 청백리 행적을 읽은 사람들은 이런 내용이 쉽게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화책이나 신문 칼럼은 역사학적 고증 없이 민간의 이야기에 토대를 둔 것이므로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게 지저분하게 산 사람이 어떻게 청백리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라고 말이다. < 세종실록 > 은 그가 이미지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사안을 의논하거나 자문에 응할 때에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사리에 어긋남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세종대왕)에게 중후하게 보였던 것이다."

황희의 부정부패가 살아생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생전에도 비위 사실이 문제가 된 적이 많았지만, 그는 세종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공격이나 비판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이 황희에게 "내 아들을 부탁한다"고 당부했기 때문에, 세종대왕도 그를 가벼이 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희는 정세판단 능력이 기민하고 업무수행능력이 탁월했으며 무엇보다도 주군의 심리를 잘 간파했다. 이렇게 쓸모가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태종이나 세종은 그의 결함을 가급적 덮지 않을 수 없었다.

고위공직자 검증이 더 철저해야 하는 이유



 

황희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세종 10년 6월 25일자(1428년 8월 6일) < 세종실록 > . 오른쪽 첫번째 줄은 황희를 '황금 대사헌'으로 지칭하는 부분이고, 두번째 및 세번째 줄은 황희가 간통범 및 살인범인 여성을 자기 집에 숨겨주는 조건으로 수년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부분이고, 네번째 줄은 황희가 "정무를 담당한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과 황희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 세종실록 > 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용기 있는 사관들의 노력에 힘입어 황희의 비리가 실록에 기록될 수 있었지만, 이런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구한말까지도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실록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십 년도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실록에 기록된 황희의 부정부패는 세상에 쉽게 알려질 수 없었다. 그래서 최악의 탐관오리인 그가 최상의 청백리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십 년간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한 노년의 공직자가 단 며칠간의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불명예 퇴진하는 예가 종종 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뻔히 알면서도 청문회에 나가는 것은 막판에 자신의 욕심을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파멸을 자초하는 셈이다.

황희도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는 고도의 이미지 관리를 통해 자신의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인사청문회 제도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면, 탐관오리를 청백리로 떠받든 조선시대 사람들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황희처럼 겉보기에 좋아 보이고 깨끗해 보이는 인물일수록, 더 강도 높은 검증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된다.

 

출처: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129134206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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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일어났다, 지역주의가 흔들린다, ‘대구 콘크리트’에 금이 갔다, 대구 유권자가 ‘호남당 후보’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정당 대신 인물을 보고 투표하는 성숙한 유권자가 늘어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부겸 후보가 ‘기호 2번’을 달고 대구시장 선거에서 40.3%를 득표하자, 여러 정치평론가와 중앙 언론이 쏟아낸 평가는 대략 위와 같았다. 말하는 이는 달라도, ‘지역주의의 철옹성’ 대구에서 ‘호남당 후보’가 ‘아름다운 선전’을 펼쳐 ‘40%라는 기적’을 만들었다는 줄거리는 한결같다.

특정 지역의 유권자 표심을 지역주의로 설명하면 꽤 간편하다. 모든 선거 결과 분석은 “지역주의의 벽은 높았다”와 “지역주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둘 중 하나(때로는 둘 다)로 정리된다. 특히 대구와 같이 일관된 선거 결과를 보여준 도시라면, 지역주의의 결과라고 괄호 치기에 최적이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지방선거를 하루 앞둔 6월3일 오전, 김부겸 후보가 길거리 유세를 펼치자 지나던 한 시민이 손가락을 들어 김 후보를 지지해주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지방선거를 하루 앞둔 6월3일 오전, 김부겸 후보가 길거리 유세를 펼치자

지나던 한 시민이 손가락을 들어 김 후보를 지지해주고 있다.

 

정말일까. 2014년 대구시장 선거는 ‘답이 없는 도시’에서 일어난 기적이자 지역주의가 완화되는 징후로 읽어내면 그만일까. <시사IN>은 선거 막바지인 6월1일부터 선거운동 종료 시점인 3일 밤까지 김부겸 후보의 캠페인을 밀착 취재했다. 거기서 본 ‘괄호 안의 풍경’은 조금 더 복잡하고 다채로웠다.

김부겸 캠프 출입구에 놓인 대형 화이트보드에는 “된다!”는 글씨와 함께 중앙당 부속 민주정책연구원(민정연)의 여론조사 결과가 크게 쓰여 있었다. 43.3:43.3(2014. 5.31). 5월31일자 조사에서 소수점까지 같은 동률이 나왔다는 얘기다.

6월3일 대구 중심가인 동성로. 선거 마지막 유세에서 김부겸 후보는 한 지역언론사 1면 머리기사를 흔들며 외쳤다. “여기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대구시장 초박빙 접전! 여러분, 지금까지 대구 선거에서 ‘초박빙’ 이런 말이 나온 적 있습니까? 김부겸 찍으면 김부겸이 됩니다!”

김부겸 캠프의 목표는 ‘아름다운 선전’이나 ‘40%의 기적’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길 생각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투표 당일 서울로 올라가는 기자에게 캠프 인사 여럿이 똑같은 말을 했다. “지금 올라가면 역사의 현장을 놓쳐서 두고두고 후회할 텐데요?” 투표가 끝난 오후 6시, 김부겸 득표율 41.5%를 예상하는 출구조사 결과가 떴을 때, 캠프의 분위기는 선전에 대한 격려나 자축이 아니라 아쉬움과 탄식이었다.

‘박정희·박근혜 마케팅’이라는 위험한 전략

선거 초기에 내부 논쟁이 있었다. ‘아름다운 선거’를 할 것인가, ‘이기려는 선거’를 할 것인가. 이 논쟁에서 김 후보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로부터 위험한 전략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박정희·박근혜 마케팅. 박정희 컨벤션센터 공약, 공보물에 박근혜 대통령과 나란히 웃고 있는 사진 싣기, “박근혜 대통령·김부겸 시장·대구 대박”이라는 메인 슬로건.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이 전략이 위험했던 이유는 김부겸이라는 브랜드를 야권 내에서 크게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대구시장 선거에서 패배한다고 그를 탓할 사람은 없지만, 이런 전략을 써서 패배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전당대회나 대선 경선과 같은 ‘진영 내 정치’를 할 때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한 캠프 인사는 “생각해봐라. 그때는 당내 경쟁 후보가 우리 공보물을 신나게 돌리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 다음 유세 장소로 이동하는 후보의 차량 안에서, 왜 이렇게 위험하게 선거를 하는지 물었다. 김부겸은 한층 더 짙어진 대구 사투리로 이렇게 답했다. “선거전에 들어가니까 대구 시민들 사이에서 억눌린 분노가 들끓는 게 느껴지는데, 이게 장난이 아인기라. 야 이거 내가 이런 분노를 보고도 내 이미지 생각해서 선거를 대충 하면 안 되겠다, 진심으로 이분들에게 다가가야 되겠다 마음을 먹은 기지.”

더 흥미로운 논쟁은 그 다음이었다. 대체 어떤 게 대구에서 ‘이기는 선거’일까? 캠프 좌장 구실을 했던 김태일 교수(영남대)는 철저한 우클릭으로 보수 유권자들의 경계심을 녹인 후, “새누리당의 오만과 독선에 경고를 주도록 야당 후보도 한번 써먹어 달라”는 메시지를 구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전선을 최대한 뭉개고 보수 표를 구슬려 잡아와야 한다고 본 것이다. 거침없는 박근혜 마케팅은 그 귀결이다.

그런데 홍의락 의원(새정연 대구시당위원장) 등 지역 접촉면이 넓었던 인사들은 오히려 반대 전략을 제안했다. 박근혜 마케팅은 어느 정도까지만 하고(불필요하다고 보지는 않았다), 선거전 중반부터는 새누리당(박근혜 대통령은 예외다)과 선명하게 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목표는 보수 표가 아니라 좌절한 무당파였다.

홍 의원은 6월1일 캠프 전략회의에서, 새누리당을 심판하는 데 김부겸을 쓰라는 ‘회초리론’을 제안했다. 지금까지와 같이 전선을 뭉개는 캠페인으로는 심판론에 불을 붙일 수 없다고 보고, 선거 막판에 한 단계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초리론’에 동조했던, 대구지역 선거 경험이 풍부한 한 캠프 인사는 캠프 주류의 전략 기조를 두고 “레드 콤플렉스 콤플렉스”라고 표현했다. 대구의 ‘레드 콤플렉스’ 정서를 실제보다 과대평가한 나머지 “이번에는 바꿔보자”라는 바닥 기류에 충분히 불을 붙이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결정적인 차이가 이 대목이었다. 후보에서 캠프 좌장으로 이어지는 핵심 라인은 대구에 무당파 심판 표는 많지 않다고 보았다. 그보다 새누리당에 마음이 상한 보수 표를 살살 달래서 데려오자는 전략이었다. 반면 ‘회초리론자’들은 대구의 무당파 심판 표에 불을 붙여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핵심 전략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차이 못지않게 중요한 공통점도 있다. 두 노선 모두 ‘분노한 유권자’를 기정사실로 놓았다. ‘지역주의에 매몰되어 기호 1번을 묻지 마 지지하는 유권자’는 아예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 유권자는, 투표 결과만 보는 다른 지역 관찰자의 상상 속에서나 다수파로 존재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김부겸 후보는 인적이 드문 아파트 단지에서 홀로 연설하는 ‘벽치기 유세’를 자주 했다.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유세하는 김 후보에게 시민들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김부겸 후보는 인적이 드문 아파트 단지에서 홀로 연설하는 ‘벽치기 유세’를 자주 했다. 대구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유세하는 김 후보에게 시민들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대안을 봉쇄당한 유권자가 억눌린 분노의 출구를 찾지 못해 번번이 좌절하는 도시. 지역주의라는 괄호 치기에 가려져서 보지 못했던 대구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김부겸 후보는 “주된 갈등 축은 이미 수도권 대 지방으로 재편되었는데, 정치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아직도 갈등 축이 영남 대 호남인 것처럼 왜곡되어 있다. 그러는 사이에 대구는 경제적으로 가라앉는 도시가 됐고, 이제는 시민들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절박하게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홍의락 의원은 “대구는 산업화를 이끌어왔다는 자부심이 있는 도시다. 지금 그 자부심이 상처를 받았는데, 그동안 도시를 운영한 세력을 응징할 방법이 없어서 이중으로 분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후보 김부겸은 그 분노의 출구를 어느 정도 뚫어주었고, 유권자는 순식간에 40.3%라는 지지율로 답했다. 이마저도 쌓인 분노를 충분히 받아내지 못한 것이라는 의견이 캠프 내에서 만만찮을 정도였다.

대구 유권자는 ‘호남당’이라 2번을 안 찍는다?

그렇다면 대구 유권자는 왜 분노하면서도 대안이 봉쇄되었다고 느낄까? ‘기호 2번’을 대안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호남당’을 꺼리는 지역주의의 귀결일까? 사흘 동안 만난 대구 유권자들에게 왜 ‘2번’은 찍지 않는지를 물었다. 다수 의견은 두 가지로 모였다. 무책임하고 말 바꾸기를 하는, 반대만 하는 세력. 찍을 사람 없는 정당. 즉, 세력의 태도와 인물에 대한 불신이 핵심이었다.  “호남당이라서”라는 말은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영남이나 호남처럼 정치적 선호도가 기울어진 지역에서는 양질의 엘리트가 우세한 세력(대구에서는 새누리당)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 기회가 불균등하게 한쪽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인물 경쟁력에서 차이가 생긴다. 6월1일 동성로에서 김부겸 후보의 유세를 유심히 듣던 직장인 정 아무개씨(43)는 “나는 새누리당을 좋아하지 않지만, 선거 공보물을 보면 여당 후보들이 대개 인물이 나았다. 지금껏 선거가 계속 그랬다. 이번 대구시장 선거는 야당도 볼만한 인물이 나오니까 당장 게임이 되는 거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선호도가 기울어진 지역에서, 불리한 세력은 ‘나쁜 생존법’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새정연 중앙당의 한 인사는 대구·경북 지역의 몇몇 지역 정치인을 두고 “생계형 출마자”라고 독설했다. 당선을 목표로 하는 출마가 아니라는 얘기다.

‘생계형 출마’의 문법은 이렇다. 첫째, 지역 대표성을 확보하면 전당대회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어느 정도 지분을 행사할 수 있다. 당권·대권 주자들이 구애를 해오고, 전대나 경선이 끝나면 ‘배려’를 받기도 한다.

대구·경북(TK)과 같은 취약 지역은 지역 조직을 장악하려는 새정연 내부 경쟁이 크지 않다. 본선에서의 당선이 아니라 당내 선거에서의 지분 확보를 노리는 정치인의 침투에 취약한 구조다. 오래전부터 TK에 머무른 한 야권 정치인은 “이 지역에 헌신해온 많은 동지들이 있지만, 한편으로 선거 출마는 교두보이고 전당대회가 ‘본게임’인 사람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둘째, 집권당일 경우에는 불모지에서 광역단체장 후보로 출마한 뒤 정권으로부터 장관급 자리 등을 ‘보답’받는 경로가 있다. 생계형 출마의 스케일 큰 버전이다. 2006년 당시 열린우리당 경북지사 공천을 받은 박명재 후보는 선거가 끝나고 반년 만에 행정자치부 장관에 임명되어 지역을 떠났다. 그는 지난해 10월 경북 포항남구·울릉군 재·보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이런 사례가 누적되면서, 지역 유권자는 새정연은 못 믿을 세력이라는 인식을 굳혀갔다. 유권자가 보기에 새정연 후보 중 적잖은 이가 잿밥(당내 선거)에만 관심이 있는 함량 미달 인사이거나, 지역 헌신을 외치다 선거가 끝나면 서울로 올라가 감투를 쓰는 말 바꾸기 후보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취약한 세력에게는 이런 ‘나쁜 생존법’이 침투하기 쉽고, 유권자가 그런 후보를 외면으로 응징하는 것을 지역주의로 낙인찍기는 힘들다. 김부겸 후보는 선거 유세 내내 “저희 당이 오만하고 무책임하고 말을 바꾼다는 말씀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바꾸겠습니다. 제가 당내에서 싸워나가겠습니다”라고 외쳐야 했다.

그렇다고 상대적으로 양질의 인물을 공급받는 세력(대구에서는 새누리당)이 만족할 만한 대안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여기에도 묘한 논리가 작동한다. 안락한 텃밭에서 활동하는 정치인은 전국 단위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으므로, ‘더 큰 꿈’을 꿀수록 수도권에서 이력을 쌓으려는 경향이 있다.

자연히 지역 정치의 인재풀은 좁아진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본선 경쟁 대신, 당내 공천권자를 향한 충성 경쟁에 특화된 정치인이 득세하는 구조가 된다. 대구에서 ‘차세대’ 소리를 듣는 정치인은 유승민 의원(새누리당) 정도가 사실상 유일한데, 유 의원도 2005년 노무현 정부의 이강철 시민사회수석이 출마하는 바람에 비례대표까지 사퇴하며 ‘징발’당한 특이 사례다.

이로써 거대한 딜레마가 완성된다. 대구에서 야당은 ‘나쁜 생존법’의 침투에 취약해지며 후보군의 질 저하에 직면한다. 여당은 여당대로 유권자 확보 경쟁보다 공천 확보 경쟁에 특화된 라인업이 꾸려진다. 도시의 하락세를 체감하는 유권자가 새누리당을 심판하고 싶어도, 야당의 ‘더 나쁜 대안’을 받아들면 별수 없이 새누리당을 찍거나 아예 투표를 포기해버린다. 응징파 유권자의 투표율이 떨어질수록(대구는 2010년과 2014년 지방선거 투표율이 최하위였다) 새누리당 고정표는 더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착시’가 일어난다. 대안을 봉쇄당한 유권자의 분노는 쌓여가는데, 선거는 이전과 변함없는 결과를 되풀이한다. 선거 결과만 확인하는 다른 지역의 관찰자들은 “이번에도 지역주의”라는 말로 편안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며 자가 증식한다.

전국 최하위 투표율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구도에서 ‘지역주의’라는 괄호 치기는 여야 모두에게 안락한 도피처가 된다. 야당은 ‘나쁜 생존법’ 대신 은근히 유권자에게 패배의 책임을 돌릴 수 있다. 여당은 유권자의 심판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 양 뭉갤 수 있다.

새누리당은 이 구조의 최대 수혜자여서 딜레마를 깰 의사가 없다. 유권자는 딜레마를 깰 주체가 될 수 없다. 정치적으로 대안을 봉쇄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딜레마를 깨는 과정은 야권에서 ‘말이 되는 인물’이 장기적으로 도전해 유권자에게 대안을 제공하는 길밖에 없는데, 이 역시 정치 생명의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무척 어렵다.

2년 전부터 시작된 김부겸의 도전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할 대목도 여기다. 그가 대구라는 무심한 콘크리트를 돌연히 흔들었다는 관점은 정확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다른 지역과 다름없이 분노도 하고 응징도 원하지만 대안을 봉쇄당한 유권자에게, 그는 정치 생명을 건 도박으로 선택지를 추가해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모(본인)가 예뻐서가 아이고, 아이고 그래 야 정도면 쟈들(새누리)을 한번 정신 차리게 할 수 있겠다 해서 지지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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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17일 18대 대선을 이틀 앞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경기도 군포 산본중심상가에서 유세를 시작하자 지지자가 몰려들고 있다. 뉴시스

 

새누리당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6·4 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세월호 참사라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고 대처 과정에서 정부의 무능한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많은 국민은 투표를 통해 여당에 힘을 실어줬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을 썼던 2004년 총선 때도 그랬고, ‘디도스 사태’ ‘민간인 사찰’로 시끄러웠던 2012년 총선도 그랬다. 거의 ‘죽었다’던 새누리당은 언제나 다시 살아났다. 최근 10년 동안 열린 대선·총선·지방선거 등 총 8번의 선거에서 새누리당은 2010년 지방선거를 제외한 모든 선거에서 ‘보수당의 저력’을 보여줬다.

 

새누리당에는 어떤 일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25~35%의 고정 지지층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만 의지해서는 정당의 생명이 이토록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대체 새누리당의 이 놀라운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동안 새누리당에 표를 던져온 유권자는 누구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한국의 ‘보수층’을 집중 분석해본다.

 

1981년부터 혹은 1990년부터 ‘집권여당’

 

새누리당의 뿌리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정권 유지를 위해 만든 민주정의당(민정당·1981년 창당)에 있다. 일부에서는 민정당이 민주화운동 계열인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 김종필 총재의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이루면서 만들어진 민주자유당(민자당·1990년 창당)부터가 새누리당의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민자당도 결국 민정당을 뿌리로 결성된 만큼 새누리당은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조직된 민정당을 기원으로 한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후 민자당은 1996년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1997년에는 한나라당으로 재창당한 뒤 2012년 다시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새누리당의 뿌리가 민정당에 있든 민자당에 있든 중요한 것은 이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제외하고 언제나 ‘집권여당’이었다는 사실이다. 새누리당이 가진 인적·물적 자원과 선거 전략 노하우 등은 모두 여기서부터 나온다. 한마디로 탄탄한 집권여당 프리미엄이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새누리당은 국가 건설 이래 기득권 질서에 계속 편승해온 정당이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 질서가 어떻게 형성됐는지에 대한 역사적 궤적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도 “새누리당은 그동안 계속되는 집권으로 정치적 자원을 많이 가지게 됐다. 고시 출신 관료, 군부, 재벌, 검찰 등 사회 기득권층이 계속 수혈돼왔고 이러한 인적 자원이 새누리당에 집적돼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자원을 바탕으로 새누리당은 ‘국가체제’를 꾸준히 독점해왔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가라는 것은 한 정당에 의해 독점되지 않아야 한다. 미국처럼 사회·경제적 분야는 진보 관료들이 역할을 많이 하고 국방은 보수가 주로 역할을 하는 방식으로 다원화가 돼야 어떤 세력이 집권하든 공유제로서의 국가체제를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 불행하게도 야당이 10년을 집권했지만 이런 점을 변화시키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권력 독점이 승리의 기본적인 발판이라면, 여러 번의 승리 경험을 통해 쌓아올린 각종 선거 전략은 새누리당의 주요한 에너지원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진보세력의 이합집산과 달리 새누리당은 당내 제도화가 잘돼 있고, 조직이 튼튼하며 나름의 정책이나 전략을 꾸준히 개발하고 있다. 한국 보수의 특징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기민하고 능수능란하다는 것이다. 진보세력이 선거를 1년이나 6개월 전에 준비한다면 보수세력은 선거 하나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선거 준비로 들어가는 게 제도화돼 있다”고 말했다.

 

정권심판론에 야당심판론

 

위기 때마다 발휘되는 기민한 대처와 여론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새누리당의 모습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얘기다. 경험에 기초한 새누리당의 전략은 대부분의 선거에서 먹혀들었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정권심판론이 극에 달했던 19대 총선을 예로 들면, 새누리당은 ‘정권심판론’에 맞서 ‘야당심판론’으로 맞불을 놓았다. 새누리당은 당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제주 해군기지 문제가 노무현 정부 아래 시작된 정책이라는 점을 들어 거꾸로 야당의 ‘무책임한 말바꾸기’를 강조했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추후 연구에서 상당수 유권자가 이런 야당심판론에 공감한 것으로 나타났다(장승진, ‘제19대 총선의 투표 선택’). 자신에게 향한 거센 반발 여론을 상대편에 대한 반발로 옮겨놓는 전략을 정확하게 사용한 셈이다.


 

“한국 보수의 특징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기민하고 능수능란하다는 것이다. 진보세력이 선거를 1년이나 6개월 전에 준비한다면 보수세력은 선거 하나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선거 준비로 들어가는 게 제도화돼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


 

여론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자세도 오랜 경험으로 쌓아올린 새누리당의 노하우다. 최근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사태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듯, 애초 문 후보자를 감싸던 새누리당 지도부는 대통령과 당 지지율이 급락하자 며칠 만에 ‘자진 사퇴 압박’으로 태도를 바꿨다. 상황에 따라 유불리를 따져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유권자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는 것도 새누리당의 주요 전략 가운데 하나다. 새누리당 안의 개혁세력이 주로 이런 역할을 해왔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김영삼 총재를 필두로 한 민주화 세력이 이런 역할을 한 것을 시작으로, 새누리당은 이재오·김문수·손학규 등 독재에 저항했던 인물을 당내에 수혈했다. 이후에는 남경필·원희룡 등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돼 미래연대, 새정치수요모임 등을 꾸리고 당내 개혁을 이끌었다. 2004년 ‘차떼기당’의 위기에서 당을 살려낸 ‘천막당사’도 이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이들은 보수당에 실망한 유권자에게 ‘혁신’이라는 희망을 심어줬다.

 

물론 이러한 개혁세력에 대한 기대가 실현되지는 않았다. 개혁파들의 시도가 보수당의 맨얼굴에 ‘화장’이라는 덧칠만 한 채 주류의 기득권을 공고화해주는 수단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제주도지사로 당선된 원희룡 당선자는 이런 지적에 대해 최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새삼스런 질문도 아니고 변명할 이유도 없다. 제주와 관련된 정치적 사안의 실행을 통해 책임과 성과를 갖고 얘기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서복경 교수는 “한나라당 안에 소장파들이 등장하면서 합리적인 보수에 대한 지향들이 생겨났다. 이들의 시도는 진지했다. 그러나 이후 이들의 독자적 노선이 실패로 끝나면서 결국 ‘페인트모션’이 돼버렸다”고 분석했다. 따지고 보면 보수세력의 상징이 된 박근혜 대통령도 보수당이 갖추고 있는 독점적 자원, 선거 승리 전략, 여론 동원 능력 등 다양한 자원을 최대치로 활용하고 거기에 더해 페인트모션까지 충실히 이행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1987년 민주화 체제 이후 생긴 지역 분열

 

이제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유권자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이들은 크게 지역·세대·이념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간단히 얘기하면 영남 지역, 50대 이상의 연령층, 보수적 이념을 가진 유권자가 새누리당의 지지층이다.

 

이 가운데 여전히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지역이다. 우리나라는 ‘영남은 여당, 호남은 야당’이라는 지역 분열 현상이 아직도 극심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삼국시대에 그 기원을 둔다는 이론도 있고 권위주의 시대의 지역 불균형적 산업화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박상훈 대표는 공동 저서인 <어떤 민주주의인가>에서 이에 대해 “민주화 이행기에 만들어진 정치적 대표 체제(정당)의 여러 제약 조건 때문에 생겨난 정치적인 문제”라고 봤다. 편향된 지역 구도가 1987년 민주화 체제 이후에 생긴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이 책에 따르면 민주화 이전인 제12대 총선(1985년)에는 여당인 민정당이 경북·경남·전라 등의 지역에서 40~50%의 비슷한 의석 점유율을 보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지역별로 서로 다른 정당들이 각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 정당이 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제13대 총선(1988년)에서 민정당의 경북 지역 의석 점유율은 86.2%, 통일민주당(김영삼계)의 경남 지역 의석 점유율은 62.2%, 평화민주당(김대중계)의 전라도 지역 의석 점유율은 97.9%로 나타났다. 이후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이 민자당으로 합당하면서 경북·경남은 모두 보수당인 민자당이 높은 의석 점유율을 차지하게 됐고 이런 구도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정치 이념 지형이 과거에는 진보 30, 중도 40, 보수 30이었다면 최근에는 진보 25, 중도 35, 보수 40으로 변화했다. 진보를 상징했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를 이어나갈 인물이 없다는 점과 통합진보당 사태가 영향을 미쳤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


 

박 대표는 이에 대해 “선거 때마다 지역 구도로 특징지어지는 표의 지리적 분절성이 나타나는 것은 지역주의와 같이 ‘문화적 균열’이나 ‘지역 간 대립’ 때문이 아니라, 지역을 가로지르는 정책적 요구가 정치적으로 표출되고 집약될 수 있는 투표 결정 상황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즉 한 지역 안의 유권자는 계층과 이념에 따른 ‘정치적 선호’를 각각 가지고 있지만, 현재의 한국 정당이 이런 계층과 이념을 대변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권자가 각자의 선호도에 따른 정당을 선택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지역 정당에 투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각 정당이 지역을 대표하는 대신 계층과 이념을 대표하면서 모든 지역을 아우르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는 한 현재와 같은 구도는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호남보다 인구가 더 많은 영남은 대표 정당인 새누리당에 더 많은 표가 쏠리게 되는 결과가 반복된다는 얘기다.

 

386세대가 보여주는 ‘연령효과’

 

새누리당 지지층은 지역적으로는 영남이라면 연령별로는 50대 이상이다. ‘세대별 특성’은 2002년 대선을 기점으로 한국 유권자의 투표 현상을 설명하는 결정적 요소로 떠올랐다. 특히 2012년 대선에서는 50대 이상의 보수화 현상과 이들의 응집력이 더욱 강화됐다.

 

 

2007년 12월19일 대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대통령 부부가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12년 4월11일 총선에서 승리한 뒤 박근혜 새누리당 선대위원장이 여의도 당사 종합상황실에 웃으며 입장하고 있다(오른쪽). 뉴시스

 

먼저 50대 이상의 연령층이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크게 산업화 세대의 과거에 대한 향수, 참전 세대의 대북 강경 태도,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되는 ‘연령효과’로 분석된다. 최창렬 교수는 “최근 50~60대 이상의 연령층이 두꺼워지면서 보수의 충성도와 응집력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세대별 표심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속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일군 산업화에 대한 향수가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도 “한국전쟁과 월남전을 경험한 세대에게 대북 유화 정책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아니겠나. 이들이 극우적 이념 성향을 갖는다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적 시각에서 1번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50~60대의 연령적 특성은 ‘보수’라는 정치적 이념과도 연결된다. 이른바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된다는 ‘연령효과’가 대표적이다. 연령별 이념 성향과 관련된 이론은 ‘나이가 들수록 대부분 인간의 성향이 보수화된다’는 ‘연령효과’ 이론과 ‘같은 정치적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별로 특정한 이념적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세대효과’ 이론이 맞선다. 강도 높은 정치적 경험을 공유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세대인 386세대(1960~69년생)를 예로 들었을 때, 야권 성향을 가졌던 386세대도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된다는 것이 ‘연령효과’다. 반대로, 386세대는 50~60대가 되어서도 야권 성향을 그대로 가져간다는 것이 ‘세대효과’다.

 

대체로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된다는 ‘연령효과’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특정 세대가 어떤 정치적 경험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연령이 높아질수록 이들은 보수적인 사회·정치적 태도를 갖게 되며, 이러한 보수화 경향은 물질적 부의 축적이나 여러 경험을 통해 권위주의적 성향을 획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이론의 요지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논문 ‘한국의 이념성향과 생애주기효과’에서 2007년과 2012년 대선을 통해 한국의 세대별 이념 성향 변화를 분석한 뒤 이런 결론을 내렸다. “(5년 동안) 같은 세대가 나이가 들면서 과거보다 더 보수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러 세대 중에서도 특히) 유신세대, 한국전쟁 세대, 386세대, 전후산업화 세대의 보수화 경향이 더 컸다.”

 

‘연령효과’와 더불어 한국 사회 전체가 점점 보수화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경미·한정택·이지호는 2012년 한국정당학회보에 게재한 논문 ‘한국 사회 이념 갈등의 구성적 특성’에서 “2000년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위치 분포는 진보적 이념 성향에서 보수적 이념 성향의 비율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고 분석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도 “우리나라 정치 이념 지형이 과거에는 진보 30, 중도 40, 보수 30이었다면 최근에는 진보 25, 중도 35, 보수 40으로 변화했다. 진보를 상징했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를 이어나갈 인물이 없다는 점과 통합진보당 사태가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의 공고한 지지층은 과연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영남과 50대 이상 연령층을 대표하는 새누리당은 앞으로도 선거에서 계속 승리하게 될까. 새누리당이 지금까지 선전해온 것과 달리 앞으로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다양한 정책 태도에서는 진보 성향 답변

 

우선 영남 지역의 튼실한 새누리당 지지 기반은 이번 지방선거에서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김부겸 후보가 40%가 넘는 득표율을 보였다. 부산의 오거돈 야권 연대 후보도 친박 핵심인 서병수 새누리당 후보와 불과 1.31%포인트 차로 패했다. 새누리당이 지역 대표성만을 믿고 선거에 임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등이 켜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점점 보수화된다는 분석에도 이론의 여지가 많다. 서복경 교수는 “유권자의 이념 성향을 측정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이 진보 성향인지 보수 성향인지를 곧바로 물어보는 방식이 첫 번째인데, 이런 조사에서는 최근 자신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늘었다. 그러나 정치·경제·외교·교육 등 다양한 정책 태도를 놓고 조사했을 때는 진보적 성향의 응답자가 더 많다”고 말했다. 윤희웅 민정치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도 “주관적 이념 성향을 조사하는 방식은 정권의 인기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독재 대 민주’의 구도로 좌우 이념을 인식하는 경향이 큰 한국 사회의 특징을 놓고 봤을 때도 서구 사회의 좌우 개념인 ‘자유 대 평등’이나 ‘기업규제 대 자유시장’으로 좌우를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다.

 

박상훈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유권자보다 정당이라고 하는 대안들이 먼저 존재한다.” 즉 유권자의 이념적 의식이 먼저 있고 이런 의식에 의한 투표 행위가 정당 체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당이 갖고 있는 이념 대표성에 따라 유권자의 의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춰봤을 때 결국 새누리당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지역과 연령을 대표하는 정당이 아닌 계층과 이념을 대표하는 정당이다. 새누리당이 합리적 보수를 대표하는 이념 정당으로 거듭날 때 비정상적인 지역 구도가 무너지고 한국의 보수층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출처: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644012.html?_ns=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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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도 문 후보자 '식민지 배상 문제 끝났다' 칼럼 보도


일본 언론들은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가 일본 식민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등 친일적 발언을 한 것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문 후보자의 4월 서울대 강연 내용을 강조했다.

보수 우익 성향 <산케이신문>은 12일 인터넷판에서 "하나님의 뜻 발언 총리 후보자,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사과는 필요없다"는 큰 제목을 뽑아 보도했다. <교도통신>을 전재한 보도이지만 제목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사과나 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산케이신문>은 이날 조태열 외교부 제2차관이 영국 런던에서 열린 '분쟁 중 성폭력 방지 이니셔티브' 회의에서 "위안부 문제 같은 범죄가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며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는 기사도 나란히 다뤘다. 일본 언론에서 한국 총리 후보자와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극명한 '분열'을 드러낸 셈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문제가 된 문 후보자의 발언을 표로 정리해 상세히 전했다. 이 표에는 "일본에 이 이상 과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다. 위안부·징용자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는 발언 등이 정리돼 있다.

<아사히신문>은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개각을 했지만 총리 후보의 실언 여파가 가라앉지 않아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강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12일에는 문 후보자가 2005년 3월 <중앙일보> 칼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우리 힘으로 해결하자"며 일본과 협의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고 소개했다. 또한 "과거에 매달리는 우리가 부끄럽다"고 칼럼에 쓴 부분과, 1965년 한일청구권 협상으로 "식민지 배상 문제는 끝났다"고 적은 부분도 소개하며,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보도했다.

문 후보자의 이런 시각은 일본 정부가 식민지 문제 배상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이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차관 등을 한국에 제공해 식민지 지배 배상 문제는 최종적으로 해결됐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일본 정부는 이 협정을 근거로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더이상 배상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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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신문>도 12일 문 후보자가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의 뜻이다. 너희들은 이씨 조선 500년간 허송세월한 민족이다"라고 말해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 인터넷 사이트와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한국엔 어리석은 사람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차기 총리 후보 문창극씨처럼 시대와 나라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 "문창극씨는 사실을 인정한 훌륭한 사람" 등 문 후보자를 추어올리며 한국을 비하하는 우익들의 글들이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중국 관영 언론들도 문창극 후보자 자격 논란에 관심을 보였다. <환구시보>는 13일 "박근혜 대통령이 문창극 <중앙일보> 전 주필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했으나 뜻밖에 그가 과거 도를 넘은 친일, 한국인 폄하 발언을 한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조기원 기자, 베이징/성연철 특파원garden@hani.co.kr

출처: http://media.daum.net/politics/dipdefen/newsview?newsid=20140613133015570&RIGHT_REPLY=R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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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도발적인 선거 실험이 아주 조용히 시작됐다. 2014년 지방선거. 야권의 몇몇 선거 캠프는 기존 선거 문법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캠페인을 풀어나갔다. 목표는 하나였다. 집토끼의 이탈 없이, 중도 표를 잡아라.

야권에는 누구나 동의하는 논리가 있다. 한국 정치는 보수에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진보 표를 최대한 결집시키는 것만으로는 늘 아슬아슬하게 지는 선거가 된다. 그렇다면 중도 표를 잡아와야 한다. 여기까지는 쉽다. 그 다음이 문제다. 중도 표는 대체 어떻게 잡는 걸까? 우클릭해서 중도층의 구미에 맞는 정책을 내놓을까? 그러다가 고정 지지층이 이탈하면?

야권에서 주로 볼 수 있던 중도층 공략의 기존 문법은 이랬다. 중도층이 민감하게 반응할 만한 이슈를 골라 전선을 선명하게 친다. 2010년 지방선거의 무상급식 이슈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선명한 대립각을 세우면 중도 표는 양자택일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전략에서는 ‘어떤 전선을 치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중도가 진보에 가담하기 쉬운 이슈를 뽑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이렇게 뚜렷한 각을 세우는 중도층 공략을 ‘결집형’이라고 부르자. 결집형은 2002년 대선,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과 대선 내내 야권의 기본 전략이자 교과서 대접을 받았다.


 

   
 

이 결집형 전략이 과연 만병통치약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단적인’ 전략가들이 야권에 하나둘 생겨나더니, 올해 지방선거에서 한 흐름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결집형 전략을 이렇게 평가한다. “진보가 결집하면 보수도 결집한다. 그러면 싸움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이때 중도는 양자택일을 하는 게 아니라 환멸을 느끼고 이탈해버린다. 중도는 특정 세력에 애착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정치인의 태도를 민감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도 표를 끌어들일 것이 아니라 먼저 잡으러 가자고 제안한다. 흔한 우클릭론으로 들리지만 좀 다르다. 핵심은 이렇다. 선명한 전선은 치지 않는다. 상대 후보와 싸우지 않고, 낮은 자세로, 온건한 태도를 유지한다. 말하기보다 듣기에 방점을 찍고, 선두에 서기보다 공감능력을 내보인다. 찬반이 격렬히 갈리는 초대형 정책공약도 자제한다. 공약, 구도, 메시지, 특히 중요한 점으로 후보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저공비행’으로 중도를 먼저 노린다.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이슈 주도력이 떨어지고 지지층의 열정을 식혀버린다. 이러면 상대보다도 진영 내부의 비판에 특히 취약해진다. “선거 참 못한다”라는 말을 듣기 쉬운 접근법이다. 이렇게 위험부담을 지면서까지 전선을 일부러 뭉개는 접근법을 ‘침투형’이라고 부르자.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 광역단체 후보 중 적어도 4명은 확실히 침투형 캠페인을 펼쳤다. 저공비행을 하고, 전선을 뭉개고, 중도에 기조를 맞췄다. 서울의 박원순, 강원의 최문순, 충남의 안희정, 대구의 김부겸이 그랬다.

박원순 캠프가 네거티브에 무대응했던 이유


서울의 박원순 후보는 침투형 전략을 입안한 전략가보다도 한발 더 나아갔다. 선거 전략과 일정의 기본이 되는 유세차를 전부 없애버리고 걸어 다니며 유권자를 만났다(<시사IN> 제349호 “‘선거 실험’에 서울을 걸다” 참조). 네거티브 캠페인도 하지 않겠다고 애초에 선언하며 스스로 손발을 묶어버렸다. 침투형 전략을 처음 입안한 박원순 캠프의 기획자는 “네거티브를 원천 봉쇄할 생각은 없었는데 후보가 한 술 더 뜨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6월3일 서울 종각 앞 광장에서 인사를 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박원순 후보는 유세차를 없애고 배낭을 메고 걸어 다니며 유권자를 만나는 선거운동을 벌였다.  

 

ⓒ연합뉴스

 

6월3일 서울 종각 앞 광장에서 인사를 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박원순 후보는 유세차를 없애고 배낭을 메고 걸어 다니며 유권자를 만나는 선거운동을 벌였다.


박원순 캠프는 막판 정몽준 후보의 무차별 네거티브 공세에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전선을 뭉갠다는 침투형 기조가 캠프 전체에 공유되었기에 가능했다. “공보 실무자 중 한 명은 우리 기조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며 캠프를 떠나 중앙당으로 복귀하더니, 즉시 정몽준 후보를 공격하는 논평을 냈다. 엄청나게 답답했던 모양이다. 캠프에서 돌발행동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웃음).” 기조 입안자의 회고다. 

충남의 안희정 후보도 유세차와 마이크를 극도로 자제했다. 길을 걷다 만난 유권자와의 대화에 몰입하다 일정이 꼬이기 일쑤였다. 6월1일 충남 아산시. 복기왕 아산시장 후보가 안 후보를 수행하며 “도지사 오셨습니다!”를 외치자, 안 후보가 등을 툭 치며 ‘그런 것 좀 하지 마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복기왕 후보는 멋쩍게 소개를 그만뒀다. “요란 떨지 말자”는 안희정 캠페인을 관통하는 정서였다.

안 후보는 상대인 정진석 후보와도 각을 세우지 않았다. 대권 도전 의사를 내비치며 ‘큰인물론’으로 판을 끌고 갔다. 전선을 치는 대신 미래로 초점을 옮겨버리며 충청권의 큰 인물 갈망을 자극했다. 전선 뭉개기의 충청식 변형이다. 당선 직후 안희정 캠프는 승리 요인으로 셋을 꼽았다. 인물론과 대망론, 포지티브 캠페인, 조용한 선거. 하나같이 침투형 전략이다.

강원도의 최문순 후보는 도내에서 별명이 ‘네네 지사’로 통했다. 누가 말을 걸든 ‘네 네’ 하며 듣는 모습이 소문이 났다. 그는 SNS를 통해 감자 등 강원도 특산물을 팔아 지역에서 소문을 타기도 했다. 침투형의 강원도 버전이다. 6월1일 강릉 단오제 때 최문순 후보는 축제 한쪽에 펼친 자유총연맹 강릉지부 천막에 들어가 한 시간이 넘도록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다만 선거 막판에는 논문표절 공방 등이 벌어지며 결집형이 일부 가미됐다.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는 고정표가 없다시피 한 대구 버전의 침투형 캠페인을 구사했다. 중도를 넘어 보수 성향의 유권자에까지 침투를 시도했다. 박정희 컨벤션센터나 박근혜 사진을 이용한 선거운동 등을 밀어붙였다. 캠프 내부의 얘기를 들어보면 핵심은 ‘박근혜 마케팅’이 아니라 ‘전선 뭉개기’였다. “표에 도움이 안 될 정도로 너무 나갔다”라는 논란이 캠프 안에서 일기도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아래 그림은 이번 지방선거에서 새정연이 받은 표를 여러 잣대로 분석한 것이다. ‘본인 득표율’에서 ‘광역비례 득표율’을 빼면, 정당 지지층 외에 후보 개인 능력으로 벌어들인 표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가 그림의 ‘후보효과 지수’다. 그림에는 새정연에서 후보효과 지수가 가장 높은 5명을 실었다(호남은 제외했다).

   
 


침투형 후보 4명이 모두 순위에 들었다. 안희정·최문순 지사는 새누리당이 크게 우세한 지역에서 결과를 뒤집었다. 박원순 시장은 광역의원 투표까지 견인해낸 징후가 있다. 서울에서 새정연 정당 득표율은 45.4%였지만, 광역의원 선거구에서는 출마자 중 75%가 살아 돌아왔다.

이런 결과를 ‘인물 경쟁력’으로 결론 내는 기존 분석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침투형 캠페인은 인물 적합성에 더해, 전선 뭉개기, 네거티브 회피, 중도의 환멸을 막는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 등으로 이어지는 일관된 전략 기조다. 이 틀에서는 인물 자체도 결정적 변수라기보다는 침투형 전략 패키지의 한 요소가 된다. 네 곳의 캠페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큰 틀에서 침투형 기조 아래 전략을 배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정한 흐름으로 묶어보기에 충분했다.

여러모로 ‘이단’이다. 정치판의 정론인 결집형 전략에 반기를 들면서도 우클릭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기존 지지층과 중도층을 모두 잡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중도를 먼저 잡는다는 우선순위를 확정한 후, 기존 지지층을 한데 묶어낸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다는 걸까. 이들이 주장하는 핵심 변수는 후보다. 박원순 캠프의 전략 입안자는 “후보가 걸어온 삶과 정치의 궤적이 고정 지지층에 불안감을 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마음껏 중도를 잡으러 갈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역설적이게도, 정체성이 확고한 후보가 훨씬 자유롭게 침투형 캠페인을 벌일 수 있다는 얘기다.

핵심 변수는 지지층에 불안감 안 주는 ‘후보’


여론 분석 전문가인 정한울 박사(정치학·동아시아연구원 사무국장)는 이번 선거에서 야권의 대세로 떠오른 침투형 캠페인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몇 년 전부터 그는 한국의 중도층에 중대한 성격 변화가 일어났다고 느끼고 연구해온 터였다. 

그는 결집형이 가정하는 중도층과 침투형이 가정하는 중도층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중도에 대한 학계의 기존 주류 이론은, 자신의 선호나 이해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비합리적 유권자가 태도를 정하지 못해서 중도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이들을 견인해와야 하니 결집형이 먹힌다. 그런데 요즘 들어 중도층을 설명하는 새로운 개념이 ‘상충성’이다.”

   
 

 

 

 

 

 

 

 

 

 

 

 

 

 

 

 

 

 

 

 

 

 

 

무슨 뜻일까. “한 개인에게도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 예전에는 이를 무지해서 생긴 일로 보았지만, 요즘 인지과학에서는 이런 상충성이 꽤 보편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많다.” 그는 종이 위에 축 두 개를 그렸다(왼쪽 그림). 가로축은 선별 복지-보편 복지 축, 세로축은 복지 확대-복지 축소 축이다. 그러고는 설명을 이어갔다.

“복지로 예를 들어보자. 진보의 전통적인 태도는 복지는 확대되어야 하고 보편 복지가 좋다는 거다. 그러니까 여기(왼쪽 위)다. 반면 보수의 태도는 복지를 줄이고 선별 복지를 하자는 오른쪽 아래다. 각각 진보와 보수의 고정표 자리다. 그런데 꽤 많은 사람들은, 복지는 늘어나야 하지만 가난한 사람을 골라 돕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게 여기(오른쪽 위)다. 자, 이 생각이 비합리적인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주장에서 하나씩, 충분한 정보를 갖고 취사선택을 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중도층은 전통적 진보·보수 전선이 그어진다고 한쪽에 끌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둘 다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보고 퇴장해버린다.”

정한울 박사가 보기에, 중도층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중도가 단선적인 좌우 척도에서 가운데 있는, 그래서 좌우의 진보와 보수가 줄다리기를 해서 당겨오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학력, 정보 접근성, 진보·보수 정권을 두루 겪은 경험 등으로 무장한 ‘새로운 중도’는 다르다. 이들은 스스로 좌표축을 하나 더 그려서(‘상충성’), 진보와 보수의 사이가 아니라 중도 고유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되면 게임의 룰은 줄다리기에서 땅따먹기로, 결집에서 침투로 급변한다. 그는 그래프의 신(新)중도층 자리(복지 확대와 선별 복지의 조합)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2012년 대선에서 누가 결국 여기를 차지했나? 박근혜 후보다.”

18쪽 그림은 아주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로축을 경제, 세로축을 안보로 생각해보자. 이때 신중도층이 몰릴 자리는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를 조합한 장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2011년 대폭발했던 ‘안철수 현상’의 핵심이었다. 다만 안철수 현상은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진보 고정층의 의심을 걷어낼 정체성이나 정치력을 보여주는 데 실패하며 세가 쪼그라들었다. 보수 고정표의 의심을 살 리가 없는 박근혜 후보와의 차이였다. 인물 변수가 또 한 번 핵심이 된다.

  안희정 충남지사 후보(왼쪽), 최문순 강원지사 후보(가운데),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오른쪽)는 상대와 각을 세우기보다는 몸을 낮추고 중도에 기조를 맞추는 선거운동 캠페인을 벌였다.  

 

안희정 충남지사 후보(왼쪽), 최문순 강원지사 후보(가운데),

김부겸 대구시장 후보(오른쪽)는 상대와 각을 세우기보다는 몸을 낮추고

중도에 기조를 맞추는 선거운동 캠페인을 벌였다.

 

선거는 반복 실험이 불가능하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같은 결과를 두고도 수많은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침투형이라는 선거판의 ‘새로운 이단’들은 이번 선거의 성공이 어떤 보편성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통파’의 눈에 이번 선거는 침투형 기조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낮은 정당 지지율과 상대적으로 높은 후보 지지율, 세월호 정국이라는 특수성, ‘국민 미개 발언’ 등의 돌발 호재가 기막히게 겹친 결과였다.

여러 우연이 모여 침투형이라는 ‘안 되는 전략’을 떠받쳐줬다고 보는 시각이 여전히 다수파다. 근본적으로 이는, 대체 중도란 무엇이고 중도 유권자란 누구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해석 투쟁이다. 논쟁은 오래 지속될 전망이다. 더 많은 데이터와 장기적인 사례 축적이 필요해 보인다.

하나는 분명하다. 그간 궁여지책이나 임시방편으로 치부되던 침투형이라는 ‘이단’들이,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눈에 띄는 한 흐름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선거 전략의 주류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한참 이르지만, 적어도 시민권을 확보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번 선거는 비유하자면 인상적인 기조발제였다. 난상토론의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출처: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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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wit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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