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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➊ 나르도 디 치오네, ‘십자고상’, 1350~1360.

“얼마면 좋은 그림을 살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자주 듣는다. 나는 ‘1000만원’이라고 답하곤 한다.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그림 중 거실에 걸어 놓을 만한 50호 정도 크기의 유화 작품이 대체로 그 가격에서 거래되기 때문이다. 물론 젊은 작가의 작품은 절반에도 가능하겠고 유명 작가의 경우 값은 더 오를 것이다. 그러나 일단 기본 이상의 작품을 구매하고자 한다면 예산을 1000만원 정도로 잡아야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1000만원이라고 하면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427만원)의 두 배 이상 되는 큰돈인데 그림 한 점의 값으로는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화가 입장에서는 매달 1000만원짜리 작품을 한 점 이상 팔아야 비로소 도시 근로자 월평균 소득을 올리게 되는 셈이다. 작품을 화랑을 통해 판매했을 때 판매가의 절반이 작가의 몫이므로 1000만원짜리 작품 한 점을 팔면 500만원이 화가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료값도 빼야 한다. 유화 작품이 비싼 이유는 재료비가 만만치 않을 뿐더러 제작기간도 상당히 길기 때문이다. 쉽게 그려 다작하는 작가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작가는 작품 한 점을 그려내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다. 때에 따라 한 달 이상 걸려 겨우 완성해내는 경우도 있다.

그림 가격 = 도시 근로자의 월평균 소득×2

결국 1000만원에 작품이 거래되더라도 작가 입장에서 보면 손에 쥐는 게 적다고 할 것이고 사는 측에서는 가격이 너무 높다고 할 것이다. 미술 중개상(딜러)들도 작품을 판매하기 위해 전시하고 홍보하면서 구매자를 찾아 뛰어다니는 것에 비하면 돌아오는 게 적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도 현재 작품이 주로 1000만원대에서 거래된다는 사실은 ‘작가-미술 중개상-구매자’ 삼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합리적인 가격대가 그 정도임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이처럼 그림 가격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이유는 제대로 된 그림일 경우 가격이 결코 싸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오늘날 수십억원 하는 박수근의 그림이 1970년대에는 100만원밖에 안 했다고 하는데 1970년대에 100만원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앞에서 도시 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을 언급했는데 이 기준이 미술 시장의 역사에서 당시 평균적인 그림 가격을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림 가격=도시 근로자의 월평균 소득×2’라는 공식은 일찍부터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림 가격이 도시 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의 두 배가 되는 것은 여기에 미술 중개상의 몫이 추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공식은 지난번 연재에서 언급한 세계 최초의 미술 중개상 프란체스코 디 마르코 다티니의 그림 판매 손익계산서에서 잘 나타난다. 다티니는 14세기 후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오고가는 무역업을 통해 거부의 반열에 오르는데 그가 운영한 상점의 거래 품목에 그림이 자주 눈에 띈다. 다티니가 남긴 장부에 따르면 그는 1371년에 총 11점의 그림을 피렌체에서 배달받아 자신의 아비뇽 가게에서 판매했다. 작품의 원가는 피렌체 금화로 대략 5피오리노 내외였다. 당시 대규모 패널화의 가격은 100피오리노 이상이었기 때문에 그가 사고판 그림은 크기가 작은 소형 패널화일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➊).

대규모 작품과 비교해서 다티니가 거래한 작품을 오늘날 관광지 거리에서 판매되는 싸구려 기념품 그림일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피렌체 금화 5피오리노라는 금액은 당시 숙련된 기술자의 월평균 소득, 즉 오늘날 도시 평균 근로자의 소득과 거의 일치하는 액수로 가격적인 면에서 결코 저렴하다고 할 수 없다.

당시 평균 그림 가격을 놓고 봐도 이 정도가 일반적인 작품 가격이었던 것 같다(그림 ➋). 물론 14세기 후반 그림 가격의 변동 그래프를 살펴보면 흑사병이라는 대재앙 직후에는 그림 수요가 갑자기 몰려 그림 가격이 수십 배 오른다. 하지만 다티니가 화상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림 가격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요는 계속 늘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저렴한 소품들을 많이 찾으면서 평균적인 그림 가격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서양에서 미술품 소유의 대중화가 최초로 시작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적지 않은 작품들이 저택이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거래됐다(그림 ➌). 다티니 같은 영리한 상인은 이런 시대적 변화를 읽고 미술품 거래에 한발 빨리 들어갔다. 덕분에 그는 그림 거래를 통해 상당한 수익을 얻는다. 다티니는 1387년 편지에서 최근에 받은 5점의 그림 중 3점을 팔아서 각각 금화 10피오리노씩의 이윤을 남겼다고 기록했다. 그가 이 시기에 사들인 그림의 가격대는 대략 10피오리노였는데, 판매 수익률은 투자 대비 정확히 100%였다. 그는 그림 거래는 이윤이 많이 남는 좋은 장사라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했다.

15세기 땐 재료비·운반비 빼면 비싸지 않아

비록 작품을 구입한 후에 되팔아서 얻은 수익이지만 오늘날의 미술 중개상이 올리는 5:5의 수익률이 이미 600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존재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뿐이다. 물론 운반비와 세금, 그리고 시장의 불확실성을 고려한다면 그다지 큰 수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슷하게 거래되던 다른 물품들을 통해 얻는 이윤이 대략 10% 정도였기 때문에 100% 가까운 이익을 가져다주는 그림 거래는 정말 남는 장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다티니를 최초의 근대적 미술 중개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적지 않은 양의 그림을 사고팔았을 뿐 아니라 팔릴 만한 그림을 정확히 파악한 뒤 화가들과의 거래에서도 냉정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구매 타이밍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 

“저렴하게 구매할 만한 그림을 찾을 수 없다면…그냥 내버려 두시기 바랍니다. 화가들이 돈이 궁해졌을 때 그림을 사도록 합시다.” (다티니, 1387년 편지) 

이 같은 냉철한 미술품 거래가 이미 600년 전 이탈리아에서 시작됐을 뿐 아니라 거래되던 그림의 평균적 가격이나 수익 패턴도 오늘날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거듭 말하지만 이처럼 미술 거래의 역사적 씨앗이 처음 뿌려진 곳에서 르네상스라 불리는 새로운 미술이 번창하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림의 가치를 따지고 또 따지는 냉철한 상인들이 그림의 중개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스스로 그림을 사서 모으는 적극적인 구매자 또는 후원자로 성장한다는 점은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미술 중개상이면서 동시에 작품 구매의 큰손으로 성장한 근대 상인계층들은 이후 상업적 안목과 문화적 취향을 접목하며 현대식 문화를 활기차게 기획해 나갔다. 앞으로 필자의 글이 이 부분을 더 설득력 있게 짚어내기를 희망한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철학박사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50호(12.3.28~4.0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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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wit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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