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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보시라이 사태' 이면에 숨겨진 양극화 갈등

 

지금 중난하이(中南海)에서는...-보시라이 사태를 조망한다

 

중국 속담에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실은 홍루몽(紅樓夢)의 한 구절이다.

 

시진핑 부주석이 즐겨 인용하는 말이라는데 그의 오랜 벗인 보시라이에게는 들려주지 못했던 모양이다.

 

“우리 중국인들은 남한테 밉보이는 것(得罪)을 제일 기피합니다. 중국의 공직 사회에서 적을 만들면 오래 못 갑니다.”

 

며칠 전 중국 심천에서 만난 한 중급 관리가 필자에게 던져준 말이다. 그들은 너무하다 할 정도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특히 공산당원이라는 사람들이 그랬다. 중국 공산당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싫던 좋던 엄청난 외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집단이자 권력인데 그들의 속내며 실체를 제대로 알 수 없으니 예삿일은 아니다.

 

베이징 자금성(紫禁城)을 영어로는 포비든 시티(Forbidden City) 라고 쓴다. 의역이다. 금지된 도시. 그런데 바로 옆에 위치한 중난하이(中南海)야 말로 중국의 금지 성역이다.

 

중난하이는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집단 거주지이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 청사가 입주해 있는 곳이다. 중하이와 난하이라는 2개의 인공호수를 끼고 건축한 옛 황제들의 별궁이었다.

 

일반인들은 내부에 들어 갈 수 없지만, 입구를 먼 발치서 들여다볼 수는 있다. 입구 안에는 '爲人民服務(인민을 위해 일하자)'라는 글씨가 씌여진 붉은 벽이 내부를 막아서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홍장(紅粧)이란 말은 권력의 심장부를 뜻한다.

 

권력 이양기를 맞아 이 홍장 안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모든 중요 결정이 홍장안의 치열한 토론과 절충을 거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오쩌뚱이 당권과 군권을 토론으로 장악한 주니(遵義)회의 이후 정립된 중공의 전통이다.

 

이번 보시라이 사건은 그 요동의 신호탄인 셈이다. 사건의 파장이 워낙 커서 올 10월 예정된 당 대회 연기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공식적으로 당내 그런 파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호언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도 똰파이(공청단), 타이당(태자당), 쌍빵(상하이방)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것을 보면 당원들의 호언은 허언이다.

 

한때 태자당의 아이콘이었던 보시라이가 충칭 총서기직과 정치국원 직에서 전격적으로 해임되고 당원으로서는 최고의 수모이자 처벌인 쌍규(雙規)에 들어가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쌍규는 중국 공산당 기율검사위원회가 당원에 한해 무제한의 수사를 벌일 수 있는 조치로, 재판 없이도 피의자를 6개월까지 구금할 수 있으며, 가족에게 연락하거나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 역시 부여하지 않는단다.

 

분명한 것은 보시라이의 실각이 단순한 개인 비리 문제가 아니라 올 가을로 예정되어 있는 중국 지도부 개편을 둘러싼 각 계파 간 권력투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최고지도자가 공청단에서 태자당 출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현재의 권력이 차기 권력을 견제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일종에 길들이기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중국의 내일을 규정할 이념적 정책적 차이와 대립도 내재돼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13억 중국을 다스리고 있는 공산당의 최고 권부는 중앙정치국 9인 상무위원회다. 상무위원은 70세를 넘길 수 없다는 내규에 따라 시진핑과 리커창을 제외한 7명(후진타오,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 리창춘, 허궈창, 저우융캉)은 오는 10월이 되면 교체돼야 한다.

 

보시라이와 그의 라이벌로 알려진 왕양(광동성 당서기)은 유력한 후보였다. 둘 다 상무위에 진입할 수도 있었겠지만 보시라이가 상무위원이 되면 태자당인 시진핑에게, 왕양이 상무위원이 되면 공청단에 힘이 실리는 구도였다. 상무위원 선출이야말로 중난하이의 큰일 중의 큰일.

 

'중국의 케네디' 보시라이

 

보시라이는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스타 정치인'으로 꼽혀왔다. 중국의 케네디, 다렌의 보물, 충칭의 작은 마오로 불리던 그였다.

 

지명도로 본다면 진작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어 중국의 ‘넘버9’ 안에 들어갔어야 옳다. 보시라이하면 상무부장이라는 직책이 떠오르고, 다롄시장이라는 직함도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7년 동안 다롄시장을 할 때, 그는 도시 전체를 바꿔놓았다. 그가 1993년 다롄시장에 취임한 이후 다롄은 매년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하며 새롭게 성장하는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동시에 다롄을 중국 내에서 손꼽히는 환경도시로 만들어 2001년 유엔 선정 세계 500대 미화 도시에 들게 하였는데 이 때부터 다롄의 시민들은 보시라이를 ‘다롄의 영웅’으로 치켜세우게 된다.

 

그가 랴오닝성 성장으로 승진해 다롄을 떠나갈 때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눈물로써 배웅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런 그가 랴오닝성 성장과 당서기를 거쳐 중앙으로 진출, 상무부장으로 승승장구할 때 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것이라는 예상은 거의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충칭시 당서기로 내려갔다. 물론 중국의 4대 직할시 가운데 하나로 인구 3천2백만인 충칭시의 당서기로 일하는 것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좌천된 것은 아니지만 내륙 개척지 충칭으로 배정된 것은 일종의 시험무대로써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추측이 많았다.

 

역시 보시라이는 보시라이여서 지난 몇 년간 또다시 충칭시를 들었다 놨다 하던 중이었다. 충칭으로 내려간 보시라이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매매춘 단속, 폭력조직 소탕, 사설 도박장 및 퇴폐유흥업소에 대한 대대적인 적발을 실시한다. 오랜 기간 지방 공안들과 끈끈한 꽌시(关系)로 이어져왔던 사설도박장을 장갑차까지 동원해 밀어버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최근까지 충칭시 공무원들은 량장신구 기업유치를 위해 뛰어다녀야 했다. 량장신구는 상하이의 푸동(浦东)신구, 톈진의 빈하이(滨海)신구에 이은 중국의 세 번째 국가급 신구로 지난해 국무원에서 최종 비준을 받았다.

 

사실 이번 보시라이의 실각으로 가슴 졸이는 한국기업가들이 적지 않다. 한국기업 유치를 위해 량장신구에 특별히 한국기업단지를 조성해 본인이 직접 한국 기업인들을 대면하고, 한글로 브로슈어까지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기업가들을 만날 때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을 공부한다고 밝혔단다. 인천시의 송영길 시장도 지난해 충칭을 방문해 그를 만나 도시 자매 결혼이라는 이색 행사를 갖기도 했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을 전후해서는 혁명가요 홍가 부르기 운동과 혁명서적 읽기 운동, 대학생들에게 농촌생활을 체험하도록 하는 대하방(大下放)운동 등 이른바 ‘홍색 캠페인’을 줄기차게 실시해 주목을 받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보시라이가 이런 운동을 앞장서 벌이니까 화제가 됐다.

 

공산당과 보시라이의 애증

 

보시라이는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보이보(薄一波)는 1980~90년대 중국 정치를 좌지우지한 ‘8대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이다. 덩샤오핑, 양상쿤, 덩잉차오 등 기라성 같은 이름들 속에 보이보도 함께 있었다.

 

만년은 화려했지만 보이보는 문화대혁명 때 주자파(走资派)로 몰려 오랜 옥살이를 했다. 보이보의 아내이자 보시라이의 어머니인 후밍(胡明)은 광저우에서 베이징으로 압송되던 중 기차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홍위병들이 밀어뜨려 죽였다는 설도 있다. 보시라이 또한 17살의 나이에 옥살이를 했다.

 

문혁과 공산당이라면 이를 갈 사람이지만 그는 공산당 때문에 출세했고, 공산당 찬양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의심할만 했다. ‘보시라이가 무언가 대단한 야심을 갖고 있긴 있구나…….

 

그의 나이 올해로 63살(1949년생)이다. 중국에서라면 아직도 창창한 나이다. 공산당원이라면 누구나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을 정치국 상무위원 혹은 그 이상으로 도약하기 위해 그는 부단히 뛰었고 표면적으로 괄목할 성과를 올려 인기 또한 상승곡선을 계속유지하고 있었다.

 

보시라이에 대한 일반의 인기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 이후 중국의 경제가 급속히 성장한 데 반해 극심한 빈부격차로 사회 분열이 한계 상황에 왔다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원자바오 총리도 "정치개혁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문화대혁명 같은 역사의 비극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사회분열이 심화되고 있어 이를 수습하지 못하면, 결국 반동적인 사태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를 공산당 지도부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보시라이는 이런 우려에 대해 나름 명료한 해법을 제시했다. 도농간 부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정부 주도의 투자를 강조하고 관리들이 일에 솔선하는 이른바 '충칭 모델'이 그것 이었다. 시진핑 부주석은 두 차례나 충칭을 방문해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지만 지난 30여년 경제성장 과정에서 도농간의 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는 부작용을 막지 못한 중국 지도부는 충칭 모델의 성과에 적잖이 당황했다. 좌 클릭이 심하다는 우려였다.

 

게다가 보시라이는 지난해 유력 외신과의 회견을 통해 중국의 빈부격차는 지니계수로 측정할 때 ‘사회과학자들이 폭동이 일어날 수준이라고 말하는 수치’라고 밝히면서 "이를 바로 잡겠다"고 선언했었다. 이에 대해 미국의 블룸버그는 "보시라이의 이런 발언은 마오쩌둥를 다시 불러낸 것과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보시라이는 ‘마오주석이 말했듯,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목표는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와 먹을 것을 보장하고, 모두가 부를 함께 나누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라면서 ‘소수만이 부자라면, 자본주의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실패했다"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계급이 형성된다면, 우리는 정말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이 된다"고 강조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급진적 발언들은 그의 오랜 동지인 시진핑마저 보시라이를 더 이상 보호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왕뤼진 사건이 나고도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중국의 지도부는 원자바오 총리를 통해 입장을 밝혔다. 원자바오는 이례적으로 특정 인물을 지목해 비판했다. "보시라이는 반성해야 하며, 법에 따라 엄정히 사건을 처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치정 살인사건까지

 

표면적으로는 '잘 나가던' 보시라이는 측근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낙마했다. 지난 2월 초 보시라이의 오른팔로 불리는 왕리쥔 충칭시 부시장이 청두에 있는 미국 총영사관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면서 피신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왕은 "보시라이는 천하의 간신배로 그가 권력의 핵심에 들어가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거기다 그는 국가 기밀자료들을 뭉텅이로 들고 갔단다.

이로 인해 보시라이는 "사람을 잘못썼다"고 공개 반성하면서 애써 낙마만큼은 면하려고 했으나 기울어진 상황을 뒤집지 못했다.

 

왕뤼쥔 사건이 일어난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왕뤼진의 비리를 당 기율처가 조사하기 시작했고, 왕이 보에게 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하자 등을 돌리게 된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보시라이를 제거하기 위해 치밀하게 주변 측근부터 치는 숙청작업이 있었다는 것이다.

 

왕뤼진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면 보시라이는 사람 잘못 쓴 것이 분명하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지만 보시라이의 상승모드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측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때려 준 격이라고 할까.

 

여기에 변호사 출신인 그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의 추문은 그를 어떻게 해볼 도리조차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다. 난데없는 치정 살인사건까지 등장한 것이다.

 

중국의 각 언론들은 정확한 인용 없이 사건 전모에 대해 계속 흘리고 있다. 보시라이 아들 가정교사 출신으로 집안과 부인 사업의 집사역할을 해왔던 영국인 헤이우드라는 인물이 지난해 11월 충칭의 한 호텔에서 변사체로 발견 됐는데 충칭 공안은 부검도 하지 않은 채 그가 과도한 음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는 것이 사건의 개요다.

 

언론들은 구카이라이가 헤이우드와 부적절한 관계였다고 하면서 헤이우드가 생전에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고 구카이라이와의 결별 후 자신의 신변 안전을 걱정 했다는 주변의 증언을 들면서 그가 구카이라이나 보시라이에게 피살됐을 가능성이 의심된다고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이야 어떻든 간에 작금 언론의 이지메는 문혁 때 류사오치 주석 부인의 씁쓸한 일화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당시 주자파 수괴로 몰린 류사오치 주석의 부인은 환갑이 넘은 나이 였음에도 선물 받은 프랑스제 실크 잠옷을 입고 홍위병들 앞에서 조리돌림을 당해야 했었다지 않는가.

 

왕뤼진이 헤이우드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자고 보시라이를 압박 했고 이 때문에 공안국장에서 해임 당했다고도 하는데 이 모든 정황이 저들의 그간 행태상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막강 권력자의 부인이자 법률가가 결별한 측근을 호텔에서 독살했다는 것도 그렇고 그 처리를 그리 허술하게 했다는 것도 그렇다.

 

또 살인사건급의 의혹을 들고 하극상 식으로 압박해오는 측근을 의혹이 사실이라면 뜨끈 미지근하게 처리하는 권력자는 없다. 회유를 해서 공범으로 만들던지 무자비하게 깔아뭉게 입막음을 하는 것이 저들 아닌가.

 

왕뤼진은 충칭 범죄와의 전쟁 때 공안국장으로서 많은 인명을 처형되게 했고 '호랑이 의자’로 지칭되는 악명 높은 고문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고문을 즐겨하는 인물이, 나라를 배신하고 망명을 하려 했던 인물이 말하는 진실에 중국 언론이 놀아나는 것은 아닌지.

 

숨 죽이고 있는 시진핑

 

어쨌든 보시라이는 재기불능이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처형까지는 아니더라도 중형이 예상된다. 중국에서 일벌백계는 상시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 보시라이도 왕뤼진을 앞세워 2010년 충칭시 사법부장을 처형하는 등 살벌한 국면을 조성했었다. 그 살벌했던 전력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라는 조소 섞인 분석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얘기지만 중국 공산당원 사이에는 당은 오지에서 재교육을 시킬지언정 동지들을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퍼져 있다. 언론에 보도되는 처형장면은 대 인민 선전을 위한 영화 촬영이라나. 다분히 중국 공산당적인 얘기다,

 

지금은 하이에나처럼 재산 해외도피며 아들의 방탕 유학생활등 언론이 떠들고 있지만 보시라이 개인은 꽤 청렴한 인물로 꼽혀 왔었다.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져 있다.

 

일각에서 일벌레인 보시라이의 업무스타일이 아랫사람을 질리게 만들고, 윗사람에겐 안하무인으로 비춰졌다고 평하기는 한다. 그의 장기는 한밤중에 업무전화 하기. 부하직원들에게 인기가 있을 리 없다. 상관인 랴오닝성 서기에겐 “나는 장쩌민, 주룽지동지가 임명했으니 당신은 당무나 보라”며 면박을 줬단다. 화가 난 서기가 중앙에 올라가 “나를 자르든지 보시라이를 내쫓든지 하라”고 요구했을 정도란다.

 

중난하이에서는 분명 연일 격론이 오가고 있을 것이다. 그의 처벌 수위며 폭을 놓고 말이다. 상무부장 시절 그는 직급에 어울리지 않게 중난하이에 살았다는데...

 

지금은 숨 죽이고 있는 시진핑이 집권 후 옆집 친구 보시라이와 관련해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지 관심가는 대목이다. 아직까지 시진핑에게까지 후폭풍이 미칠 조짐은 없다.

 

하지만 시진핑도 집권 이후 몇 년 동안은 낮은 자세로 공청단 라이벌들이며 원로들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기에 조속한 사면 복권은 점치기 힘들다. 공청단의 태두인 후요방서기도 측근 수하였던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양명했음에도 16년이 지나서야 복권이 됐고 자오즈양 총리는 아직도 언급조차 금기시된다.

 

살얼음판을 딛고 등극한 시진핑은 전임자들보다 더 막후 원로에 의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덩샤오핑 이후로 중국정치는 집단지도체제가 완전히 굳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막후의 정신적인 최고지도자는 존재해왔다. 마오쩌둥(毛泽东), 덩샤오핑, 그리고 장쩌민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장쩌민도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정계를 떠난 것으로 보이지만 핵심요직에 대한 인사를 계속조정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쩌민이 와병중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누가 그 다음 라인에 설까.

 

전임주석 후진타오가 ‘포스트 장’의 역할을 하며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물론 후진타오의 재임기간은 후계자 수업 기간을 포함해 10년이 넘는 데다, 그동안 자신의 심복들을 도처에 심어놓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으니 이것이 일정한 정치적 자산으로 작동할 수는 있다.

 

그러나 후진타오의 보스로서의 기질이나 결단력 등에 대해서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악역을 자처한 원자바오에게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원자바오 총리는 일만 나면 징징 울기만 하는 울보 총리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원자비오는 계속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난해 그가 다롄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한 연설도 중국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화제였다. 연설 가운데 중국의 정치개혁 필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는데, ‘당정분리’라는 직접적인 표현까지 사용했었다. 직접선거의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원자바오의 이 발언이 중국 국내 신문에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대목이다. 신화통신 영문판을 비롯한 대외매체에만 공개되었다.

오죽하면 위키리크스는 “중국 지도부 내에서 원자바오는 거의 왕따 수준”이라고 보도하기도 했었겠는가. 때문에 원자바오는 자기 캐릭터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정치개혁의 목소리를 내기는 하겠지만 퇴임 후 전임 총리들과 마찬가지로 칩거할 가능성이 높고, 후에 혹시 정치적 격변의 시기가 오면 당내 민주화의 상징적 아이콘으로 부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보시라이 사태를 통해 원자바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권위를 높였다. 앞으로 보시라이 사건의 처리 과정과 처벌 수위를 보면 그의 추후 행보도 관측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그래도 일정한 목소라야 내겠지만 그가 최고 막후 실력자가 된다는 것은 가능성 거의 없는 상상이다.

 

원로 그룹에선 주룽지에 주목해야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이 휘두르던 권력의 크기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로 중국 공산당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인물은 앞으로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다.

 

원로 그룹에서 그래도 굳이 꼽자면 주룽지(朱镕基) 전 총리가 새로운 ‘실세 원로’로 떠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주룽지는 은퇴 이후로는 거의 대외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근래에 들어 임팩트 있게 중국 인민들에게 다가서고 있는 원로다.

 

주룽지는 지난 10년 간 공개 활동이라고는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식, 덩샤오핑의 부인 줘린 여사의 장례식 참석 정도가 전부였고 지도자로서 생색내기 좋은 베이징 올림픽 개폐회식 때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난 2009년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 당시 천안문 성루 주석단에 선글라스를 끼고 올랐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는데 백발이 된 그를 보고 많은 중국 인민들이 안타까워 했다는 소식이다. 그해 그는 '주룽지, 기자에게 답하다'(朱鎔基 答記者問)라는 책을 출판했고 출간 2개월 만에 2백만부가 팔려 나갔다. 정부 단위의 대량 구매가 전혀 없이 순수한 중국의 라오바이싱(일반백성)들이 주룽지를 그리며 책을 샀단다.

 

그런데 주룽지의 회고록이라고 할 만한 책이 지난해 또 출판됐다. 주룽지의 재임시절 연설문 등을 한데 엮은 주룽지강화실록(朱鎔基讲话实录)이 중국 서점가에 쫙 깔렸고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는 눈여겨볼만 하다. 그동안 조용히 지내던 주룽지가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떠오르고 있는 것일까? 중국 정치에는 ‘그저 의미없이’ 움직이는 일이 별로 없다.

그는 경제통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책을 상세히 소개한 광명일보는 그의 개혁 정신 전반과 위민 애국의 생애를 칭송하다 시피 하고 있다. 인민일보와 함께 공산당 기관지인 광명일보는 중견 간부이상을 주독자로 하는 고급 여론 선도지다.

만약 주룽지가 장쩌민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죽은 덩샤오핑이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주룽지는 덩샤오핑이 직접 발탁한 인물이다. 천안문 사태의 와중에 국가주석이 된 장쩌민의 개혁 의지를 못 미더워 하던 덩샤오핑은 더욱 강력한 인물을 장쩌민의 옆에 두고 싶어했는데, 그때 찾아낸 인물이 그였다. 상하이 시장으로 있던 그를 파격적으로 부총리에 기용, 경제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의 임무를 맡겼고 치밀한 두뇌와 옹골찬 배포를 지닌 주는 덩의 기대에 부응했다.

 

주룽지는 강경론자들의 위세에도 기죽는 법이 없었다.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 늘어나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100개의 관을 준비해라. 99개의 관은 그들의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내 것이다.”

 

그런 주룽지가 막후에서 움직이는 중국은 ‘죽은 덩샤오핑이 여전히 움직이는 중국’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가 상하이방에 속한다는 점도 그의 향후 입지에 플러스요인이다.

 

이번 보시라이 사태를 보면 중국 공산당이 최고지도자를 선임함에 있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말 많고 시끄러운 사람, 언론의 주목을 받기 좋아하는 사람, 튀는 사람은 ‘최고’의 자리로까지는 못 올라간다. 먼저 나는 꿩이 총 맞는다고 했던가. 적어도 오늘의 중국에서는 그렇다.

 

이런 중국과 중국 공산당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지리와 역사를 근린 사섭 하고 있지만 결코 우방이라고는 할 수 없는 G2 국가, 최대 교역 상대국, 지구촌에서 가장 큰 독재 정당이 통치하고 있는 나라, 그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 갈 것인가.

 

누가 그 속에서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자신의 명패를 닦고 있으며 어느 돼지가 적당히 통통하면서도 날렵한 돼지인가.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필자 소개: 안동일

 

198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면서 미주 동아일보, 세계일보, 라디오서울 등 동포 언론에서 활동했다. 북한을 비롯 중국 구소련 쿠바 베트남 니카라구아등 공산권 국가들을 수 차례 방문, 그 취재기를 여러 매체에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방북 경험을 토대로 한 통일염원 소설 ‘해빙’을 93년 발표했으며 이후 2004년 영구 귀국해 우리 역사와 통일문제에 천착한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북관대첩비’ ‘영웅 안중근’ ‘구루의 물길’ ‘장수왕의 나라’ 등을 최근 발표했다.

서울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미국 뉴욕 시립대학 메스커뮤니케이션학과를 다녔고 뉴저지 페얼리 디킨슨 대학 국제관계센터의 연구교수를 지냈다.

 

안동일 저널리스트

 

[출처] : 뷰스앤뉴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85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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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wit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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