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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류(분석)가 사라지고 지류(정보 수집 및 전달)가 그 자리를 꿰찼습니다.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의 솔직한 자기 고백이다. 그는 리서치 업계의 현실이 부끄러울 정도라며 고개를 떨궜다. 무엇이 애널리스트를 이렇게 부끄럽게 만드는 것일까. 한때 '증권가의 꽃'으로 불리던 애널리스트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고액 연봉의 거품은 꺼진 지 이미 오래다. 그들을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시선도 차갑기만 하다. 우리나라에 지금과 같은 형태의 리서치센터 조직체계가 갖춰지고 애널리스트의 업무분화가 이뤄진 시기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다. 애널리스트 1세대로 활동하다 지금은 해외상품부로 자리를 옮긴 이윤학 우리투자증권 이사는 "외환위기 직후 스티브 마빈 쌍용증권 이사가 외국계 증권사의 조직체계와 분석틀을 가져오면서 애널리스트가 섹터별로 특화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IMF 외환위기 전까지 리서치센터는 투자분석실 또는 투자전략실로 불렸고 특정 업종에 특화된 애널리스트도 거의 없었다. 리서치센터라는 용어는 지난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정착됐다. 이때부터 리서치센터가 시장 전체의 흐름을 살피는 투자전략팀과 특정 분야를 담당하는 섹터별 기업분석팀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시장이 박스권에 갇히면서부터 섹터 분석은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입지를 굳혀갔다. 최근 사전 정보 제공과 엉터리 실적 예측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섹터 애널리스트의 출발이었다.

업계에 애널리스트의 전성기가 언제였냐고 물으면 2001~2007년을 답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바로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이 촉발한 전세계 금융위기 바로 직전까지다. 이 시기는 500포인트대에 불과했던 코스피지수가 1,000포인트를 넘어 2,000선까지 추세적으로 상승했던 때다. 리포트가 나오면 주가가 즉각적으로 반응할 때여서 애널리스트도 덩달아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환경은 바뀌었다. 국내 경제는 장기간 저성장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코스피도 박스권에 갇혀버렸다. 지수가 지지부진하면서 기관투자가들은 더 이상 시장의 방향성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시장의 방향성과 관계없이 수익을 낼 수 있는 정보가 대접을 받았고 애널리스트들은 그 수요에 맞춰 종목별 분석을 해야 했다. 정확하게는 분석보다 취재가 요구됐다.

특히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1~2년 전부터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 간의 갑을관계가 심화됐다. 특히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분위기를 바꿨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당시 업계에서는 '미차디' '미차솔'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미차디와 미차솔은 업계 최초로 조 단위 자금을 끌어모았던 '미래에셋 차이나 디스커버리 펀드'와 '미래에셋 차이나 솔로몬 펀드'를 지칭하는 말이다. 두 펀드의 덩치가 너무 커 시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다 보니 부작용도 발생했다. 바로 갑(펀드매니저)의 횡포다.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한 연구원은 "미차디와 미차솔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 간 관계가 이 정도는 아니었다"며 "미래운용에 기업 분석 보고서를 들고 찾아가면 '당신이 뭘 안다고 보고서를 가지고 오나. 당신 의견은 필요 없으니 IR 담당자를 통해 숫자(실적)가 나오면 그거나 제일 먼저 알려달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원은 "펀드에 편입한 종목의 목표주가를 낮추면 주문을 안 받아주고 매도 보고서를 낼 때는 먼저 전화를 해달라는 얘기도 나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당시 운용 업계 선두를 달리던 미래의 이 같은 행태는 순식간에 업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후 애널리스트가 펀드매니저에게 숫자를 먼저 알려주는 것이 당연한 업무로 굳어졌고 목표주가를 올리기 전에 미리 언질을 주기로 하는 등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관행이 됐다. 본류가 좁아지자 지류로 물이 몰려들었고 새로운 흐름이 시장을 장악해나간 것이다.

요즘 리서치 업계의 현실은 암담할 정도다. 지난해 CJ E&M 사태를 계기로 애널리스트가 IR 담당자로부터 사전에 실적에 대한 정보를 받기 어려워지면서 애널리스트의 실적 예측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CJ E&M의 2·4분기 영업손실은 131억원이었다. 이에 앞서 애널리스트들은 CJ E&M의 2·4분기 영업이익을 100억~190억원 수준으로 전망했다.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장은 "애널리스트 스스로 업황·상품별 판매 증가 등을 고려해 매출을 추정할 수 있는 모델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IR 담당자에게 의존하다 보니 그런 능력이 전혀 쌓이지 않았다"며 "애널리스트들이 IR 담당자로부터 들은 숫자를 토대로 결론을 정해놓고 논리를 찾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천편일률적인 보고서도 문제다. 애널리스트들이 단체로 기업을 탐방한 후 IR 담당자가 주는 자료를 정리하는 정도의 보고서가 판을 치는 것이다. 한 시니어 애널리스트는 "후배들에게 '떼 지어 다니지 말라'고 늘 강조한다"며 "어떤 날 보면 한 업체에 대한 리포트가 동시에 5~6개씩 올라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보고서에서 차별화된 분석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는 애널리스트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강조했다.

꼬리(정보 수집 및 전달)가 몸통(분석)을 흔들면서 정작 실력 있고 연륜 있는 연구원들은 스스로 짐을 싸고 있다. 정보기술(IT) 관련 기업 분석 1세대로 꼽히는 박재석 삼성증권 연구원도 그중 하나다. 박 연구원은 최근 작은 게임업체로 자리를 옮겼다. 박 연구원과 같은 세대로 그를 곁에서 지켜본 한 펀드매니저는 "박 연구원은 항상 자신만의 분석 방법과 논리가 있었기 때문에 의견이 다르더라도 경청했다"며 "그런 능력 있는 연구원이 업계를 등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환경이 다시 정상화되고 증권가의 꽃이 생기를 되찾는 데는 잘못된 풍토가 조성된 시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CJ E&M 사태 이후 업계의 불편한 관습들에 제동이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은 채 우리의 시야에서 잠시 벗어난 상태다. 한 업계 고위관계자는 "잘못된 풍토가 굳어진 기간이 길었던 만큼 이를 수정하는 시간도 길 것"이라며 "근본적인 업계 풍토의 변화 없이는 CJ E&M 사태는 1~2년이 지난 뒤 다른 형태로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간략하게 네 가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기업을 공개하고 자금조달을 한 업체들은 기업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이자비용으로 생각하고 애널리스트들 혹은 투자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의무를 다해야 한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들의 부품업체 입막음 풍토도 개선돼야 한다.

애널리스트들 역시 펀드매니저, IR 담당자와의 먹이사슬을 끊어내고 본인의 철학을 가지고 취재보다 분석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평가 방식도 바꿔 분석능력이 있는 애널리스트에게 가산점을 주고 부정한 행위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출처: http://economy.hankooki.com/lpage/stock/201409/e2014091217421511764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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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wit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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